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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창원 황씨

by 아름다운비행 2020. 12. 1.

o출처 : blog.daum.net/hwangkjin62/7071013?category=559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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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황충준(黃忠俊)은 고려 충렬왕 때 문하부(門下部)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을 역임했다.
그의 선계(先系)는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원조(遠祖) 황락(黃洛)이며, 그의 셋째 아들 황병고(黃丙古)의 자손이 창원황씨(昌原黃氏)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황충준(黃忠俊)을 시조로 하는 까닭은 황병고(黃丙古) 이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사보(癸巳譜)’에 보면 황충준(黃忠俊) 이후의 세계(世系)도 확실치 않아 고려조에 공부상서(工部尙書) 로 정토장군(征討將軍)을 지낸 황신(黃信)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계대(系代)를 잇고 있다.
그런데 창원황씨(昌原黃氏)는 시조를 같이하면서 중조를 달리하는 여러 파가 있다.
물론 황충준(黃忠俊)을 시조로 시중공파(侍中公派)가 가장 벌족하지만, 고려조에 밀직사(密直使)를 지낸 황하연파(黃河宴派), 당황(唐黃)이라 불리는 공희공(恭僖公) 황석기파(黃石奇派), 호장(戶長)을 지낸 황양충파(黃亮沖派), 예빈동정(禮賓同正)을 지낸 황성찬파(黃星燦派), 전서공(典書公) 황윤기파(黃允奇派), 호장공(戶長公) 황우룡(黃祐龍派) 규정공(糾正公) 황괘파 등으로 나뉜다.

주요 세거지


시중공파(侍中公派)를 중심으로 보면, 1세 황신(黃信)의 대 이래로 강원도 철원(鐵原) 일대를 창원황씨(昌原黃氏)의 세천지(世阡地)로 지켜왔던 점으로 보아 일찍이 그곳에 터를 정하여 살았던 것 같다.
7세 황순경(黃舜卿)의 자손들 중에서 첨정공파(僉正公派)는 10세 황안우(黃顔佑)의 대부터 15세 황도희(黃道曦)의 대에 걸쳐 보은(報恩)ㆍ청주(淸州)ㆍ대덕(大德)ㆍ김해(金海)ㆍ경산(慶山)ㆍ진주(晉州)ㆍ달성(達城)의 현풍(玄風)ㆍ창원(昌原)ㆍ함안(咸安)의 칠원(漆原)ㆍ마산(馬山) 등지로 산거(散去)해갔으며 그밖에 일부 자손들이 논산(論山)ㆍ옥천(沃川)ㆍ양산(梁山)ㆍ울주(蔚州)ㆍ시흥(始興)ㆍ거제(巨濟) 등지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의창군파(義昌君派)가 10세 황림(黃琳)ㆍ황호(黃浩)의 대를 전후하여 양주(楊州)ㆍ대덕(大德)ㆍ청도(淸道)ㆍ선산(善山)ㆍ예산(禮山)ㆍ파주(坡州)ㆍ영천(永川)의 신녕(新寧) 등지와 홍천(洪川)ㆍ공주(公州)ㆍ여주(驪州)ㆍ대구(大邱)ㆍ고양(高陽)ㆍ경산(慶山) 등지에 나뉘어 살았고, 판관공파(判官公派)는 11세 황신구ㆍ황명구 이래로 창녕의 영산(靈山)ㆍ성주(星州) 등지에, 도정공파(都正公派)는 10세 황숙(黃璹)이 밀양(密陽)으로 낙향한 이후에 밀양(密陽)과 16세 황한휴(黃漢休) 이래 고성(固城)에 정착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는 16세 황기팔(黃基八)의 대를 전후하여 성주(星州)에 터를 굳혔으며, 첨지공파(僉知公派)는 8세 황■(黃■)이래로 당진(唐津)에 세거하였던 것 같다.
황순경(黃舜卿)의 동생 황우경(黃禹卿)의 자손들은, 현감공파(縣監公派)가 14세 황권(黃權)의 대부터 2~3대에 걸쳐 논산(論山)의 은진(恩津), 창녕(昌寧)의 영산(靈山)ㆍ보령(保寧)ㆍ금산(錦山)ㆍ합천(陜川) 등지에 자리잡았고, 첨정공파(僉正公派)는 철원(鐵原)과 9세 황복중(黃福中) 이래로 개성(開城)ㆍ김해(金海) 등지에, 주부공파(主簿公派)는 8세 황■(黃■)의 대부터 11세 황덕룡(黃德龍)의 대에 걸쳐 고창(高敞)ㆍ보령(保寧)ㆍ고성(固城) 등지와 17세 황종명(黃鍾鳴)의 대 이후에 장성(長城)ㆍ부안(扶安)ㆍ하동(河東)ㆍ거제(巨濟) 등지에 세거하였다.
또한 황우경(黃禹卿)의 네쩨 아들 황원(黃瑗)의 후계(後系)인 군수공파(郡守公派)는 9세 황해중(黃海中)ㆍ황윤중(黃允中)의 대 이래로 정읍(井邑)ㆍ영광(靈光)ㆍ파주(坡州)ㆍ청도(淸道) 등지에 많이 살았으며 직장공파(直長公派)는 11세 황이창(黃以昌)ㆍ황이흥(黃以興) 이래로 연기(燕岐)ㆍ무안(務安)ㆍ화순(和順)ㆍ창주(敞州)ㆍ나주(羅州)ㆍ함평(咸平) 등지와 황해도 금천(金川)에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세 황탕경(黃湯卿)의 자손들은 봉교공파(奉敎公派)가 여주(驪州)ㆍ청주(淸州)ㆍ울산(蔚山)ㆍ하동(河東)ㆍ화성(華城)ㆍ여천(麗川)ㆍ안성(安城)ㆍ홍성(洪城)ㆍ양산(梁山)ㆍ보은(報恩)ㆍ보성(寶城)ㆍ나주(羅州)ㆍ공주(公州)ㆍ성주(星州) 등지에 많이 살았고, 좌랑공파(佐郞公派)는 철원(鐵原)ㆍ장성(長城)ㆍ홍성(洪城)에, 영춘공파(永春公派)는 철원(鐵原)ㆍ포천(抱川)ㆍ광주(廣州)ㆍ수원(水原)ㆍ청원(淸原) 등지에, 서담공파(西潭公派)는 고창(高敞)ㆍ영광(靈光)ㆍ보은(報恩)ㆍ천원(天原)ㆍ여천(麗川)ㆍ홍성(洪城)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영흥공파(永興公派)는 영광(靈光)ㆍ합천(陜川)ㆍ여주(驪州)ㆍ천안(天安)에, 학생공파(學生公派)와 참판공파(參判公派)는 거제(巨濟)와 충무(忠武)에 많이 살았다고 믿어진다.
7세 황문경(黃文卿)이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인동(仁同)에 유배된 뒤에 그 자손들이 칠곡(漆谷)에 세거하게 되었던 사실이 ‘갑자보(甲子譜)’에 나타닜고, 5세 황담(黃淡)의 자손들은 일부가 7세 황힐 이래로 무주(茂朱)에, 6세 황경원(黃景源) 이래로 진도(珍島)에 자리잡았던 것을 비롯하여 울주(蔚州)ㆍ영광(靈光)ㆍ영암(靈岩)에 살았다.
한편 3세 황효경(黃孝敬)의 자손들은 5세 황숙(黃淑)의 대 이후에 강원도 고성(高城)에, 6세 황승량(黃承良) 이래로 창원(昌原)에 살게 되었고 뒤에 제주(濟州)ㆍ양양(襄陽)ㆍ시흥(始興)ㆍ부산(釜山)ㆍ진해(鎭海) 등지로 산거(散去)해 갔으며, 황효경(黃孝敬)의 동생 황효공(黃孝恭)의 자손들은 5세 황장손(黃長孫)ㆍ황무(黃茂)의 대 이후에 홍성(洪城)과 사리원시(沙里院市)를 비롯하여 아산(牙山)ㆍ괴산(槐山)ㆍ예산(禮山)ㆍ서산(瑞山)ㆍ합천(陜川)ㆍ횡성(橫城)ㆍ거창(居昌)ㆍ연기(燕岐) 등지에 정착ㆍ세거하였다.
그리고 2세 황거직(黃居直)의 자손들은 황거직(黃居直)의 현손 황언원(黃彦源) 이래로 예산(禮山)과 영천(永川)의 신녕(新寧) 등지에 세거하다가 뒤에 일부가 당진(唐津)ㆍ보령(保寧)ㆍ경산(慶山)ㆍ고령(高靈)ㆍ울산(蔚山)ㆍ달성(達城)ㆍ칠곡(漆谷)ㆍ제주(濟州) 등지로 옮겨가 정착했다고 믿어진다.
1세 황호(黃昊)의 자손들은 전북 일대에 세거했던 것 같다.
1930년 경 창원황씨(昌原黃氏)는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문산읍(汶山邑), 강화군(江華郡) 일원, 강원도 고성군(高城郡) 거진읍(巨津邑), 충남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 천원군(天原郡) 목천면(木川面), 금산군(錦山郡) 군북면(郡北面), 전북 고창군(高敞郡) 상하면(上下面), 전남 영광군(靈光郡) 일원, 경북 월성군(月城郡) 산내면(山內面), 경남 진양군(晉陽郡) 일반성면(一班城面), 창녕군(昌寧郡) 계성면(桂城面)ㆍ영산면(靈山面), 의창군(義昌郡) 북면(北面), 거제군(巨濟郡) 장목면(長木面), 고성군(固城郡) 거류면(巨流面), 하동군(河東郡) 금남면(金南面), 함안군(咸安郡) 일원,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문화면(文化面)ㆍ궁흥면(弓興面), 사리원시(沙里院市), 평남 강동군(江東郡) 고천면(高泉面), 평북 의주군(義州郡) 의주읍(義州邑)ㆍ위화면(威化面), 철산군(鐵山郡) 백량면(栢梁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씨족史

창원황씨(昌原黃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8개 파가 있다. 충렬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황충준(黃忠俊)을 시조로 하고 고려말의 황신(黃信)을 1세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와 충혜왕~공민왕의 5대에 걸쳐 벼슬하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낸 황석기(黃石奇)를 시조로 하는 회산군파(檜山君派)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 외에 창원(昌原)을 토착하여 호장을 지낸 황량충(黃亮沖), 황존우(黃存祐), 황우룡(黃祐龍)을 각각 시조로 하는 호장공파(戶長公派) 3개파 및 황성찬(黃星燦)을 시조로 하는 예빈동정공파(禮賓同正公派), 황윤기(黃允奇)를 시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그리고 규정공파(糾正公派)가 있다.
이들 각파의 후손들은 창원(昌原)을 본관으로 하는 점은 일치하나 서로의 소목관계는 알 수 없다. 이중에서 시중공파(侍中公派)와 회산군파(檜山君派)의 후손은 중앙정부에서 크게 현달하기도 하였으므로 창원(昌原)을 떠나기도 했겠지만, 호장공파(戶長公派)와 같은 경우는 창원(昌原)에 토착하여 지방세력을 이루었다고 보인다.
시중공파(侍中公派)에서는 1세조 황신(黃信)의 아들 황거정(黃居正)이 조선개국3등공신이 되어 가문의 기반을 닦았고, 그 후손에서는 황재(黃梓), 황인검(黃仁儉), 황인점(黃仁點)의 3부자가 유명하다.
회산군파(檜山君派)에서는 회산군(檜山君) 황석기(黃石奇)와 그 아들 황상(黃裳)이 연이어 봉군(封君)되고 재상의 반열에 오르는 등 고려말에 가장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 후손에서 황형(黃衡), 황신(黃愼), 황기(黃琦), 황일호(黃一皓), 황련조(黃蓮祚) 등이 유명하다.
창원(昌原)은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檜原縣)(합포(合浦))이 조선 태종조에 통합되어 이루어진 지명이다. ‘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성씨조(姓氏條)를 보면 황씨(黃氏)는 본래 의창현(義昌縣)의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황씨(黃氏)는 본래 의창현(義昌縣)의 토착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시중공파(侍中公派)의 분파는 7세조 황순경(黃舜卿)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황우경(黃禹卿)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황탕경(黃湯卿)의 후손이 전첨공파(典籤公派)로 나뉘어지고, 6세조 황현원(黃顯源)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황대원(黃大源)의 후손이 참의공파(參議公派)로 나뉘어진다.
또 7세조 황인경(黃仁卿)의 후손이 사과공파(司果公派), 황유경(黃攸卿)의 후손이 사직공파(司直公派), 3세조 황효공(黃孝恭)의 후손이 병사공파(兵使公派), 2세조 황거직(黃居直)의 후손이 부사공파(府使公派), 8세조 황선종(黃善從)의 후손이 호장공파(戶長公派)이다.
회산군파(檜山君派)의 분파는 황석기(黃石奇)의 증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나뉘어진다. 황진(黃珍)의 후손이 교위공파(校尉公派), 황수(黃琇)의 후손이 첨정공파(僉正公派), 황인헌(黃仁軒)의 후손이 참군공파(參軍公派), 황의헌(黃義軒)의 후손이 군사공파(郡事公派), 황예헌(黃禮軒)의 후손이 감정공파(監正公派), 황지헌(黃智軒)의 후손이 부사정공파(副司正公派)로 나누어진다.
회산군(檜山君) 황석기(黃石奇)와 아들 황상(黃裳)의 행적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황석기(黃石奇)는 충혜왕비인 원(元)의 덕령공주(德寧公主)를 따라 와서 충혜왕~공민왕의 5조를 섬겼다. 충혜왕 3년 지신사(知申事)로서 조적의 난을 진압하고 1등공신이 되었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고 충정왕 1년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서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5년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어 2년 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승진했으나 다음해 파직되었다.
공정공(恭靖公) 황상(黃裳)은 충혜왕 떄 호군(護軍)이 되고 공민왕초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추충익찬공신(推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오른 뒤 공민왕 5년 부원세력의 거두인 기철(奇轍) 등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올랐다. 뒤에 면직되었다가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종하고 교주강릉도도만호(交州江陵道都萬戶)가 되어 왕경을 수복하는 데 1등공신이 되었다.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에 올라 추충탈의익찬공신(推忠奪義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왕 때 여러번 왜적을 격파하였다. 그는 선친의 기일에 원씨(元氏) 부인을 취하여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았으나 우왕이 그의 재주를 아껴 용서하고 원씨(元氏)만을 유배보냈다. 활을 잘 쏘아 이름을 천하에 떨쳤는데, 일찍이 원(元) 순제(順帝)도 그 이름을 듣고 불러보았다.
황신(黃信)은 고려말에 공부상서정토장군(工部尙書征討將軍)을 지냈다. 거정(居正), 거직(居直)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황거정(黃居正)은 무인출신으로 조선개국 3등공신에 참여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황거직(黃居直)은 철원도호부사(鐵原都護府使)를 지냈다.
황거정(黃居正)의 큰 아들인 황효성(黃孝誠)은 음사(蔭仕)로 행삼등현령(行三登縣令)을 지냈고, 황효공(黃孝恭)은 무과(武科)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다.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은 성종 11년 무과(武科) 및 진현시(進賢試)에 급제, 6년 뒤 다시 무과중시(武科重試)에 장원하여 혜산진첨절제사(惠山鎭僉節制使)에 특진하였다. 중종 5년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전라좌도(全羅左道)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ㆍ도총관(都摠管)ㆍ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를 거쳤다. 1512년 함경도 지방에서의 야인(野人) 반란을 진압하고 평안도(平安道)ㆍ함경북도(咸鏡北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황기(黃琦)는 황형(黃衡)의 아들도 중종 1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3사(三司)의 관직(官職)을 거쳐 직제학(直提學)ㆍ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했다. 1537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하지 않아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이 해 김안로(金安老)일당이 몰락하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승진, 좌승지(左承旨)ㆍ도승지(都承旨)ㆍ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1539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
황섬(黃暹)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던 백곡(柏谷) 정탁(鄭琢)의 문인이면 선조 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이어 모운사(募運使)로 군량수송에 공을 세우고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광해군 즉위년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화를 입자 이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는데, 만년에는 학문에 열중했다.
황응규(黃應奎)는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중종 3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과거에는 여러번 실패했다. 후에 성균관(成均館)의 천거로 전한사별제(典翰司別提)가 되어 장흥고직장(長興庫直長)을 지낸 뒤에 선조 2년 52세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였다. 1588년 고향에 은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양곡을 군량(軍糧)으로 바쳐 그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1594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으며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되어 장정(壯丁), 군량(軍糧)등을 모집하여 출전을 준비중 병사했다.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은 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선조 21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관해 대신(大臣)들이 직언(直言)하지 않는다고 논박하다가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되고, 1591년 건저(建儲)의 문제에 관련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기용되어 1596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적영(敵營)에 다녀온 뒤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명사(明使)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화의(和議)가 결렬된 뒤 명(明)나라의 원조를 청하게 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그 뒤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공조(工曹)ㆍ호조(戶曹)의 참판(參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1601년 대사헌(大司憲)으로 문경호(文景虎)에게 지탄받는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파면되었는데, 이듬해 사행(使行)중 또 앞서의 사건으로 대사헌(大司憲) 정인홍(鄭仁弘)에게 탄핵을 받고 삭직(削職)되었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功)으로 위성공신2등(衛聖功臣二等)에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무고로 옹진(甕津)에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인조초(仁祖初)에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유집으로 ‘추포집(秋浦集)’,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가 있다.
황진(黃璡)은 선조 7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의주부윤(義州府尹)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왔을 때 호종한 공으로 선무원종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으로 이판(吏判)이 되었다. 황찬(黃璨)도 임진왜란 당시 군량과 의병모집에 공을 세워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었다.
충렬공(忠烈公) 지소(芝所) 황일호(黃一皓)는 인조 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을 거쳐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 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로 남한산성(南漢山城) 수비(守備)에 공(功)을 세웠다. 그 후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내고, 1638년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어 청(淸)에 원수를 갚고자 명(明)나라를 도우려다가 청인(淸人)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황흠(黃欽)은 숙종 3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으로 있을 때 김수항(金壽恒)과 더불어 ‘현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그 후 예조좌랑(禮曹佐郞)ㆍ홍문관교리를 거쳐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폐비 민씨(閔氏) 환궁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벼슬은 대사헌(大司憲)ㆍ도승지(都承旨)ㆍ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황재(黃梓)는 숙종 4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정언(正言), 수찬(修撰), 지평(持平), 사간(司諫)등을 역임하고, 영조 10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그 후 경주부윤(慶州府尹),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헌(大司憲),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와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역임하고, 영조 26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다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돌아보고 온 견문을 기록한 기행문집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을 간행하여 청나라의 문물을 소개했다.
황인검(黃仁儉)은 황재(黃梓)의 아들이며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영조 2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1760년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이 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다음해 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예조참판(禮曹參判), 공조(工曹)ㆍ형조(刑曹)ㆍ이조(吏曹) 등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1765년 제학(提學)을 거쳐 다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황인점(黃仁點)은 영조 27년 영조(英祖)의 딸 화유옹주(和柔翁主)와 결혼, 창성위(昌城尉)가 되었고, 정조가 즉위한 해에 진현겸사은사(進賢兼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온 것을 비롯하여 사신(使臣)으로 청(淸)나라에 7차례나 다녀왔다. 1801년 (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앞서 1783년의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 사행(使行) 당시에 서장관(書狀官)이었던 이동욱(李東郁)의 아들 승훈(承薰)이 북경(北京)에 따라가 천주교(天主敎) 서적(書籍)을 구입(購入)해 온 사실이 드러나 한때 삭직당했다.
창원황씨(昌原黃氏)의 인물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황사영백서사건’의 주모자 황사영(黃嗣永)이다.
그는 정약현(丁若鉉)(다산(茶山)의 맏형)의 사위로 정조 14년 진사(進士)가 되고 처가의 인도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1794년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배웠다. 신유박해(1801) 때 제천 배론(排論)의 산속에 피신하여, 주문모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의 교세(敎勢) 및 박해의 상황, 외세에 의존해 천주교를 조선에 널리 펼칠 방책 등을 적어, 같은 교도인 황심(黃沁),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 북경주교 구베아(Gouvea)에게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잡혀 모두 사형되었다.
이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탄압이 한층 강화되었는데, 이는 백서의 내용 때문이었다.
본래 백서는 한 줄에 1백 10자씩 1백 21행, 도합 1만 3천여자에 달하는 것이었으나, 조정에서 줄여서 지금 남아 전하는 것은 겨우 1행에 65자 15행, 도합 8백 60여자로 되어있다.
백서의 내용은 대략 3개 대목으로 나눌 수 있다.
① 당대의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사옥 때의 순교자 약전 ② 주 신부의 자수(自首)와 수형(受刑) ③ 정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4개 근본 건의책 1. 서양 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본의 요구 2. 청황제(淸皇帝)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신부를 보낼 것 3. 조선을 청에 부속시키고 친왕(親王)에게 명하여 조선국을 감독하게 할 것 4. 전쟁을 모르는 조선에 배 수백척과 강한 병사 5ㆍ6만으로 서양 전교대(傳敎隊)를 조직하여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도록 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이 당시의 상식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극단의 문구까지 사용하였으며 오직 자신의 종교를 위하여 나라까지 외국의 손에 넘기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뮈텔 주교도 불역본(佛譯本) 서문에서 “음모의 대부분의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라며, 동시에 “조선 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고 논하였다.
황학수(黃學秀)는 일제하의 민족항쟁기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1903년 참위(參尉)로 복무하다가 3ㆍ1운동 후 상해(上海)로 거너가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정원의원(議政院議員)을 지냈고, 그 후 만주(滿洲)로 가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參謀長)이 되었다. 1921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ㆍ군사령(軍司令)을 역임, 1927년 중국(中國) 일원의 교포 자치단체를 통합하여 군민회의(軍民會議)를 결성할 때 군무위원(軍務委員)에 뽑혔다. 1938년 임시정부군사위원(臨時政府軍事委員)ㆍ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을 역임,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特派員)으로 서안(西安)에서 의용군(義勇軍)을 모집하고, 1941년 의용군(義勇軍)을 토대로 광복군(光復軍)을 조직, 사령관(司令官) 대리(代理)로서 항일전선(抗日戰線)에서 진두지휘했다. 이어 임시정부(臨時政府) 생계부장(生計部長)이 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50년 대종교(大倧敎)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가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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