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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 야나기 무네요시 기고 전문

by 아름다운비행 2020. 6. 8.

o 출처 : 동아닷컴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0608/101402907/1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 야나기 무네요시 기고 전문

조종엽기자 입력 2020-06-08 03:00수정 2020-06-08 03:00

 

일제의 광화문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동아일보 기고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오늘날 맞춤법으로 고쳤다. ‘이조(李朝)’와 같은 당시 용어는 그대로 살렸다. 이 기고는 1922년 8월 24~28일 동아일보 1면에 (1)~(5)회로 연재됐다. (※) 표시된 문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고에는 일제의 사전 검열 탓에 실리지 못했으나, 일본의 잡지 ‘가이조(改造)’ 1922년 9월호에는 실렸던 부분이다.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

야나기 무네요시

(1)

이 한 편을 공개할 시기가 성숙한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장차 행하려는 동양 고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하여 나는 가슴을 짜내는 듯한 아픈 생각을 느낀다.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에 경복궁을 찾아보지 못한 여러 사람들은 왕궁의 정문인 저 장대한 광화문이 장차 파괴될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겠기로 신경에 아무 느낌과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독자가 동양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인 것을 믿고 싶다. 가령 조선이라는 것이 직접의 주의(注意)를 여러 많은 사람에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점차 인멸(湮滅·자취가 없어짐)하여 가는 동양의 고(古) 예술을 위하여 이 한 편을 정성껏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한 편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한 예술이 잃어버리게 되는 운명에 대한 애석의 문자(文字)이다. 그리고 그 예술의 작자(作者)인 민족이 목전에 그 예술의 파괴를 당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나의 동정하고자 하는 애달픈 감정의 피력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제목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없다면 부디 다음과 같이 상상하길 바란다.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궁성(에도성, 일본 황거·皇居를 이름)이 폐허가 되며 그를 대신해 그 위치에 큰 서양풍의 일본총독부 건물을 짓게 되고, 저 푸른색 물이 흐르는 해자를 넘어 높고 흰색 벽으로 솟는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니면, 정으로 치는 소리를 듣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하게 상상해보라. 나는 그 에도(오늘날 도쿄)를 상징하는 일본 고유 건축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사실 미적으로 이보다 뛰어난 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만들 수 없지 않겠는가. (아, 나는 망해가는 나라의 고통에 대해 여기서 새롭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똑 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번역: 일본 도쿄 예술대 연구진)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切迫)하였다. 네가 이 세상에 잇다는 기억이 냉랭한 망각 가운데 장사(葬事)되어 버리려 한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 나의 생각은 혼란해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 혹독한 끌과 무정한 철퇴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다. 이것을 생각하고 가슴을 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너를 구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행히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너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 사람뿐이다.

아직 이 세상은 모순의 시대이다. 문 앞에 서서 너를 쳐다볼 때 누가 그 위력(威力)의 미를 부인할 자 있으랴? 그러나 이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자는 반역의 죄를 받을 것이다. 너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하여 그 곳에 있는 여러 사람은 어둡고 쓰린 무정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너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며 이후 세월이 지나갈수록 너를 애모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갈 것도 나의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모의 애(愛)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다. 아니 이러한 애(愛)를 죽이라고 강제하는 세상이다. 아!! 생각할수록 괴로운 아픔이 가슴을 누른다. 그러나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니 이야말로 답답하고 아프지 아니한가?

아무나 말하기를 주저하리라.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 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이 까닭에 나는 말할 수 없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네가 죽는 이 때에 한 번 너의 존재를 이 세상에 의식케 하려고 나는 이 한 편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있는 장소에서 1000마일 이상이나 떠나 있는 내가 홀로 침묵을 깨치고 소리를 친다 할지라도 어둠의 힘과 강한 형세로부터 너를 구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시비를 논단(論斷)하는 이 말을 결코 무의미한 말이라고 생각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이를 쓰는 것이 나에게 대하여는 한 가지 큰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의 운명을 다시 회복하도록 보증하여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존경과 정애(情愛)가 이 세상에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의 미(美)와 역(力)과 운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실로 적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그 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너는 그 적은 사람의 정애라도 받아 주겠지? 어쨌든 너의 죽음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여다오?

나는 이 현세에서 장차 떨어지려는 너의 운명을 회복하여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영(靈)의 세계에서는 너를 불멸의 자(者)로 만들지 아니하고는 마지 아니하겠다. 실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는 자유는 나에게 없으나 이 문자 가운데서 너를 불멸케 하는 자유는 나에게 있다. 아? 나는 이에서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싶은 힘으로 잘 □각(刻)하겠다. 마치 너를 산출(産出)한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석 위에 끝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2)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얼마 아니 하여 없어지리라. 그러나 없어져서는 안 될 너의 존재를 위하여 나는 이 글을 쓴다. 그리하고 나는 농후하고 선명한 먹으로써 이 글쓰기를 게을리 아니한다. 지상에 있는 시선에서는 너의 자태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쓰는 이 문자는 지상의 어느 곳을 물론하고 널리 전파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를 근저(根抵) 깊게 기념하기 위하여 이 적은 추도문을 공중(公衆) 앞에 보내는 것이다.

아!!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뜻 아닌 죽음의 운명을 당하고 얼마나 무참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맛보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과 쓰림을 생각하고 작지 아니한 동정을 보내고자 하노라. 아! 불쌍한 너의 영(靈)이여! 만약 네가 갈 곳이 없으면 나 있는 곳으로 와 주며 네가 죽은 후에는 이 문자 중에 길이 살아다오. 누구든지 이 문자를 읽고 너를 생각해 줄 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의 존재가 한 번 다시 여러 독자의 따듯한 의식 가운데에서 애모(愛慕)의 기억을 일으킬 날이 기어이 올 것이다. 그러나 여러 많은 사람은 너에게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말하지 말라는 무서운 제재를 받고 있다. 그 까닭에 나는 그런 사람을 대신하여 발언의 자유를 지금 택하려고 한다.

아!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도다 너의 자태. 지금부터 50여 년 전 옛적에 너의 왕국 중에 가장 굳센 힘을 가진 섭정(攝政) 대원군이 그의 주저치 않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왕궁을 잘 지키라는 의미로 남면(南面)한 훌륭한 장소에 굳은 기초를 정한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조선이 존재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여러 많은 건축이 전면좌우에 연락(連絡)하여 있으며 광대한 도성의 대로를 직선으로 하야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서로 호응하야 있으며 그리하고 북에는 백악(白岳)의 장식(裝飾)이 잇고 남에는 남산의 요위(繞圍)가 있어서 이 황문은 과연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점령했다. 이러하여 3개의 관문을 중앙에 두르고 거대하고 견고한 화강석으로 높이 축조했으며 그 위에 전통을 잘 지키는 중층(重層)의 건물을 용립(聳立·우뚝 솟음)케 했다. 여러 가지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문은 좌우로 균등(均等)의 고탑(高塔)을 연(延)했으며 그 위에는 각루(角樓)가 아름다운 자세를 보전하고 있다. 앙현(仰見)하는 자로 누가 그 자약(自若)의 미에 대하야 놀라지 않을 자가 있으랴? 이것은 과연 일국의 최대한 왕궁을 지킴에 적당한 정문의 자세이다. 독자여! 이것은 이조 말기의 작품이라고 업신여기지 말라! 그리하고 완려하고 우아하고 정치한 미를 얻어 볼 수가 없다고 냉랭한 생각을 가지지 말라! 도리어 이조 말기에서라도 이러한 위대한 작품을 낸 것을 감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하고 단엄(端嚴)한 그 자태에는 의지(意志)의 미가 표현돼 있지 않은가? 불교의 고려조는 먼 과거로 흘러가고 지금은 유교의 이조 말이 아닌가? 지(地)의 교훈에서 양육된 사람은 대지에 누울 견고하고 안전한 미를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된다. 광화문에 대하여는 이조의 미의 권화(權化)를 목전(目前)에 느낄 것이다. 보아라! 광화문이 어떻게 단순하게 태연히 땅에 서 잇는 것을. 문을 지나는 자마다 모두 그 권위에 놀랄 것이다. 실로 한 왕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건설한 적호(適好)의 기념비이다.

여러 많은 사람은 이미 저 문전 광장에 무수히 쌓아 놓은 거대한 재료가 화염에 싸여 경복궁 재건의 기도가 수포에 돌아가게 됐던 것을 기억하리라. 비상한 노고와 막대한 비용이 덧없는 일편(一片)의 회신(灰燼·재)으로 돌아가 일반 인민이 뜻하지 않았던 재화(災禍)에 그만 의지가 약해진 때에 그러한 변사(變事)를 일고(一顧)도 아니하고 곧 그 실행을 최촉(催促)한 대원군의 의지의 강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실로 금일의 저 광화문은 그 불요부절(不撓不折)의 정신의 대담한 피력(披瀝)이다.

그는 그가 죽은 지 겨우 20여 년 후에 그의 의지로 지어 놓은 이 견고한 문이 이처럼 빨리 와괴(瓦壞·기와가 깨지듯 부서짐)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예술적 의식이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대하여 이러한 무참한 파괴가 백주에 감행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행히 이것이 오문(誤聞·잘못된 소문)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간은 지체 없이 달려와서 파괴되려는 그 무서운 광경이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러면 이 검은 형세를 제지할 힘은 어디를 가든지 어찌 못할 것인가? 아! 동포여 동양의 순수한 건축을 경애하라! 이에 필적할 만한 건물을 우리는 세우지 못한 것이 아니냐? 오늘날 생활에 소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버려서는 인되겠다. 예술은 공리의 관계를 초월한 자(者)이다.

(3)
미(美)가 있는 자(者)는 길이 보존하여라. 더구나 순 동양식의 예술은 우리의 영예를 위하야 깊이 사랑하라! 여러 가지 사정에 있어서 그러한 예술을 수호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추모요 예술에 대한 이해인 것을 깊이 각오(覺悟)하라! 저 광화문은 비록 근대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동양에서는 그렇게 많지 않은 훌륭한 건축이다. 조선에서 다섯 개의 우수한 문을 택한다고 하면 저 광화문은 반드시 그 가운데 하나인 작품이다. 작품의 양이 많지 못하고 역시 그 수가 매우 적은 조선에서는 더구나 중요한 건축의 하나가 아닌가? 저 광화문이 주도(主都)의 미(美)를 장식하고 있는 한 요소인 것은 누구나 모두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 주문(主門)이 없어진 때에 경복궁에 무슨 힘이 있으며 경복궁을 잃어버린 때에 한성(漢城)에 무슨 면목이 있으랴? 저 왕궁보다 더욱 정확한 형식과 더욱 위대한 규모를 가진 건축은 조선 안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이조 건축의 대표이며 모범이며 정신이로다.

정치는 예술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염치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힘을 삼갈지어다. 도리어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의 할 일이 아니냐. 우방을 위하여 예술을 위하여 역사를 위하여 도시를 위하여 더구나 그 중에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구원하라! 그것이 우리의 우의(友誼) 상 정당한 행위가 아닌가?

특히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게 하는 제(諸) 관아를 좌우에 이끌고 용립(聳立)한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야 멀리서 대황로(大皇路)를 밟으며 광화문을 바라보는 광경은 참말 잊어버릴 수 없는 위대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냐? 자연과의 배치를 깊이 고찰하여 잘 계획한 그 건축에는 이중(二重)의 미가 있도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함부로 그 사이에 있는 유기적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찌 하랴? 지금은 천연과 인공과의 좋은 조화가 이해(理解) 없는 자로 인하여 파괴되리라는 것을. 이것이 만약 꿈에 불과하다면 다행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운 현실인 것을 어찌 하랴?

마음을 고요히 하여 10여년 옛적을 생각하여 보라! 위대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어 문 앞에 가까이 나갈 때 사람은 알지 못하게 그 장엄한 미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이리하여 중문으로 들어가 금천교를 건너가면 앞에는 장대한 근정전이 용립하고 뒤에는 강녕전과 경회루의 기와가 물결치는 모양으로 서로 중첩하여 있다. 다시 금원(禁苑)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혹은 녹색으로 혹은 적색으로 몸을 장식한 10여 개의 건물이 혹은 그 아래 연화(蓮花)를 피우고 혹은 그 위에 송지(松枝)를 뒤덮어 각각 보기 좋은 장소를 택하여 있다.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 북에는 신무문 그리하고 남면의 정문을 이름하여 사람들은 광화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연한 조직(組織) 있는 광경은 다시 두 번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이조의 대표적 건축인 강녕전과 교태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이 되고 변형이 되어 지금은 다만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만이 작은 산 옆에서 고요히 떠오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최대의 건축인 근정전을 문 앞에서 우러러 볼 날은 두 번 우리에게 오지 아니할 것이다. 곧 얼마 아니하여 그러한 동양의 건축과 아무 관계 없는 방대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곧 장차 완성될 총독부의 건축이 지금 그 준성(竣成)을 급히 하고 있지 아니한가? 아! 이미 전날에는 자연의 배경을 고찰하고 건축과 건축의 관계를 숙려하여 모든 점에 균등의 미를 포함케 하여 순 동양의 예술을 보류(保留)하려고 한 노력이 지금에 이르러는 전연(全然)히 파괴가 되고 방기가 되고 무시가 되었으며 이에 대신하여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을 침범한 것이다. 이리하여 광화문에 연속된 흥례문은 이미 자취도 없어졌으며 저 금천교와 또 그 아래로 보이던 석조의 괴물(怪物)은 무참히 파괴를 당하여 지금은 다만 그 석편(石片) 등이 풀 속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저 위대한 경회루는 이후에도 잔존하겠지만 그것은 다만 유연(遊宴)의 용(用)으로만 공급될 것이다. 이리하여 남는 광화문은 그 위치에 서고 있을만한 의의를 참혹히 잃어버릴 것이다. 이전 날에는 그 문이 없어서는 안 될 위치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도리어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그 건물을 사용하는 자가 변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랴? 누구든지 저 양풍의 건축이 광화문의 존재를 무시하고 설계된 것인 것은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4)
현대의 동양, 주마등과 같이 모든 것이 격변하여 가는 현대 조선에서는 저 광화문이야말로 참말 귀중한 유작품(遺作品)이 아닌가? 이 까닭에 그 파괴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지를 숨길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실현되려는 파괴에 대하여 아!! 우리는 무슨 말을 하랴?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하고 그 대신에 무엇이 건설되겠는가? 우리는 위대한 자를 무익한 노력으로써 파괴하고 그 대신에 왜소한 문을 세우게 되는 날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아!! 그러면 여러 사람은 눈물을 흘릴까? 그만 미쳐 버릴까? 어떠한 기예로라도 저 광화문보다 더 장엄하고 더 거대하고 더 아름다운 문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광화문과 장차 세울 문을 마음에 그리고 어느 문이 우월할까를 선택하여 보라! 그 선택함에는 일순간의 시간이라도 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파괴가 기탄(忌憚) 없이 감행됨에야 무슨 말을 하면 좋을 것인가? 여러 사람은 결코 스러지지 아니 할 하나의 기억이 스러지라고 강제하는 날이 시시각각으로 가까워 옴을 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스러지지 아니할 기억이 이 문자(文字)로써 여러 사람의 가슴에 인(印) 박힐 수가 있을는지? 어찌하여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줬는가? 아! 어찌하여 그 파괴되는 문을 구원할 수 없으리만치 그처럼 비참한 경우에 빠진 자기가 되었는가? 우리에게 그것을 변해(辯解·변명)할만한 변해다운 변해가 있을까? 우리가 이러한 파괴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우리의 우의(友誼) 상 정당한 일일까? 또는 이 건축에 대한 정당한 이해일까? 우리는 그 파괴를 시인할 만한 적극적 이유를 어디를 가든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우리는 공연히 대답할 수 없는 대답을 바라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파괴하는 그 사람은 대답하려고도 아니하고 파괴를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 아! 시간은 주저 없이 광화문의 사형(死刑)을 우리에게 고하고 있도다.

문은 재흥(再興)된 후로부터 겨우 50여 년의 성상(星霜)을 지났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누가 지었으며 또는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는 지금도 오히려 새로운 추억이 아니냐? 그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지금도 남아 있는 이 때에 이러한 파괴를 감행하여 그러한 기억을 추가케 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하야 너무도 무정하고 무참한 행위가 아닌가?

나는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고 파괴를 피하여 이전을 계획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면 이 자비스러운 처치로써 어떠한 운명을 광화문이 받을까? 다행히 죽음은 이로 인하여 면한다 할지라도 문이 가지고 있던 의의는 그만 반(半) 넘게 죽어 버리는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문이요, 딴 곳의 문이 아니다. 저 위치와 저 배경과 저 좌우의 벽을 제하고는 광화문에 얼만한 가치와 생명이 있을까를 생각하여 보라! 형체는 남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추상적의 생명 없는 형체가 아니냐. 특히 자연과 건축과의 관계와 조화를 생각한 고인(古人)의 주의를 무시하고 그것이 얼만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인가? 아!! 그러면 다시 저를 ‘사(死)’에서 구원할 수는 없을까? 저의 존재와 가치를 시인하고 보호하려는 사람은 없는가? 저는 아직 젊도다. 육체는 완연히 건강하고 정신은 의연히 견고하지 아니한가! 때 아닌 죽음을 저에게 최촉(催促)하는 죄는 그 책임을 누가 지려는가!

아?!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너의 많은 여러 벗들은 이미 너보다 먼저 죽어 바렷다. 도성의 서방(西方)을 장식하고 있던 돈의문(서대·西大)과 소의문(서소·西小)의 양 문은 벌써 시민의 눈에서 자취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다. 선년(先年)에 내가 혜화문(동소·東小)을 방문하였을 때 그 문은 보호자가 없는 까닭에 그 가련한 모양은 풍우(風雨)에 쓰러져 버릴 듯이 보였다. 너의 존귀한 형제인 숭례문(남대·南大)은 성벽에서 고립이 되었으며 또는 보잘 것 없는 철책으로 겨우 몸을 보전하고 있다. 사랑하여 주는 주인이 없는 너는 얼마나 그 짧은 운명을 애달피 생각하는가? 죽지 아니할 네가 죽지 않으면 안 될 이 세상을 얼마나 부자연하게 저주하고 원망하는가?

(5)

아!! 문 앞에 안치된 2개의 큰 석사(石獅)여. 너는 오랫동안 잘 왕궁의 정문을 수호하였다. 추운 때나 더운 때나 어느 때를 물론하고 그 자태를 변치 않코 너에게 가까이 오는 자의 마음에 마다 위대한 권위로써 임하였다. 그리하고 문에 상당한 위엄과 확실로써 궁전에 더할 수 없는 미를 첨부하였다.

너는 지금도 묵묵히 전면을 바라보고 있으나 장차 네 주인의 신상에 내릴 운명을 위하여 너는 걱정하지 아니하는가? 아! 너는 자세히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너의 주인은 이미 임종의 상(床)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리하고 너도 영원히 동(動)하지 않겠다는 그 장소로부터 장차 동하게 될 날이 가까워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 그러면 너는 장차 어디로 가게 되려는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너를 가져가는 그 사람까지도 그 날이 오지 않으면 그 곳을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용서해 다오? 나는 죄 있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사죄하려고 한다. 나는 그 까닭에 지금 사죄의 붓을 든 것이다.

혹은 더운 여름철이나 또는 하늘 위에 눈송이 날릴 때나 그러하고 석모(夕暮)의 반월(半月)이 청백(靑白)의 빗을 누상(樓上)에 던질 때나 그 어느 때를 물론하고 나는 몇 번이나 여러 가지 생각을 마음에 그리고 그 문을 쳐다봤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도 그 거대한 모양이 아른아른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런데 저 광화문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괴로운 현실임에야 어찌 하랴? 누구든지 그 문을 파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사정으로 인하여 너를 이러한 비참한 파탄의 도정까지 인도하게 되었는가?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말한 그 말을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 한다’ 하는 이 말을. 만약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고 하면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그 우열(愚劣·어리석고 못남)한 죄를 지지 아니할 것이다.

광화문이여 장수할 너의 운명이 단명에 마치고 마는 것을 너는 얼마나 괴로이 생각하고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아직 건전(健全)하여 있는 그 동안에 다시 바다를 건너 너를 찾아가려 한다. 너는 나를 고대하여 다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시간을 이용하여 이 한 편을 쓰는 것이다. 너를 산출(産出)한 너의 친한 민족들은 지금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에 그러한 사람을 대신하여 너를 애석히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너의 생전에 말하여 두고 싶다. 그 까닭에 나는 이 말을 기록하여 공중(公衆) 앞에 보내는 것이다. 이로써 너의 존재가 다시 한 번 의식 깊게 여러 사람에게 반성을 준다고 하면 나는 얼마나 기뻐하랴? 그리하고 내가 기록하는 이 문자로써 그 의식을 영원히 계속케 한다 하면 너도 얼마나 기뻐할 것이냐? 그러면 이것이 나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랴?

(1922. 7. 4. 도쿄에서)

조종엽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