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난국을 타개할 자, 김육을 톺아보라
대동법·화폐통용 정착시킨 조선의 경제개혁가 삶 조명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부국강병 주창한 ‘근세 실학자’ 참모습
영의정 김육의 화상. 숙종이 찬양한 시가 상단에 적혀 있다. “여윈 얼굴빛에 하얗게 센 머리이며 신선 같은 풍채로다. 그 모습이 누구신가, 잠곡 정승이로다. 기묘명현의 후손이요 대대로 충효를 전해 온 집안이로다. 엄정하게 조선 정사를 행하며 기력이 다할 때까지 국사에 힘쓰셨구나. 마음을 다하여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신명이 통할진저. 아아, 선대의 어진이여, 소자는 흠숭합니다.” 실학박물관 제공
김육 평전
이헌창 지음/민음사·3만2000원
수상한 시절이다.
2020년. 시민의 힘으로 통치능력을 상실한 정권을 탄핵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4년을 맞은 해. 정책적 개혁 성과가 뚜렷하지 않은 와중에 구체제의 반격은 강도를 높여가고, 극한의 진영 대결은 위험수위를 넘은 지 오래. 여기에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신음하고 있다.
모처럼 즐거운 상상 한번 해보자.
조선시대 지도자 중에서 난국을 타개할 인물을 지금 한국 사회로 불러올 수 있다면 누가 좋을까?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 뛰어난 유학자이자 경세가였던 율곡 이이, 임진왜란기 위기를 수습하며 시대를 성찰한 류성룡, 인문부터 과학기술까지 망라한 르네상스적 정치인 정약용…. 너무나 익숙한 이름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한국경제사를 전공한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낯선 이름 ‘김육’을 손에 꼽는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혁명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선 정도전을 추천한다. 시대 과제를 통찰한 담론과 정책을 제시할 인물을 구한다면 율곡이 되겠다. 풍전등화의 전시 국난을 타개하고 그 극복을 위한 현명한 대책을 마련할 정치가라면 류성룡을 추천한다. 오늘날 한국처럼 국가적 발전의 난관에 직면하여 그것을 타개할 제도 개혁을 강인하게 추구할 정치가를 구한다면 김육을 불러오고 싶다.”
도대체 김육이 누구길래? 김육(1580~1658)은 17세기 인조와 효종 대에 활약한 명신으로, 대동법과 화폐통용을 강력하게 밀어붙임으로써 조선 후기 조세, 화폐개혁을 이뤄낸 개혁가였다. 요즘말로 하자면 뛰어난 실력에 ‘영혼’까지 갖춘 고위 공무원이었다.
김육이 처한 시대적 난관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거치며 인구는 격감했고 토지는 황폐해졌다. 아시아 최강 군사력을 갖춘 일본의 침략에 망할 뻔했던 조선 왕조는 대오각성이 불가피했다. 역사적 평가와는 별도로, 광해군, 인조, 효종 모두 집권 초기 사회경제개혁을 추진한 이유였다. 어린 시절 김육 본인도 전란의 고초를 피해가지 못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유학자 김식의 고손자로 ‘기묘명현’의 고고한 가풍을 지녔지만, 11살에 지방 수령이었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14살에 아버지를 여읜 뒤부터는 혼자서 동생을 돌봐야 했다. 임란으로 각지를 떠돌며 피란을 다녔고 한동안 고모 댁에 의탁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가문을 지키고 벼슬에 나아가겠다는 포부를 지녔다. 그는 “네가 자립하여 우리 가문을 세우면 나는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평생 가슴에 새겼으며, 자식들에게도 이를 강조했다. 저자는 김육이 12살 때 <소학>을 읽다가 “처음 임명된 관료가 만물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두면, 반드시 인민을 구제할 것이다”라는 송나라 정호의 말에 감동한 대목에 주목한다. 김육은 ‘경세제민’의 포부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벼슬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20대 후반 성균관 유생이 되지만, 광해군 때 계축옥사로 서인이 몰락하자 서인의 핏줄을 지녔던 김육은 경기도 가평군 잠곡(현재 청평)에 들어가 밭을 갈고 글을 읽으며 10년 동안 은거했다. 인조반정 이후 인재등용책에 힘입어 ‘학행이 우수한 유생’으로 선발돼 다시 세상에 나온 김육은 의정부,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 등에서 이력을 쌓았고 효종대에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내며 약 30여년간 관직에 종사했다. 중앙관료로서 일국의 경제를 바라보는 식견도 있었으나, 음성현감, 충청도 감사, 개성부 유수 등 지방관을 지낸 경험은 민생의 현장을 훑고 밑바닥 실무를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1638~1639년 1년간 충청감사를 지내면서 16세기 말부터 조세개혁의 방편으로 제기된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야 한다는 데 확신을 갖게 된다. 조선시대 조세는 ‘조용조’ 즉 농지세(粗), 요역과 신역(庸), 공물(調)로 이뤄져 있는데, 대동법은 이중 과세 기준이 불투명하고 중간 수탈이 심한 공물을 토지면적에 따른 쌀 또는 면포로 일괄 징수하는 제도였다. 조세체계를 단순하고 투명하게 만들뿐더러 자의적인 수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농지에 비례해 부과되었기 때문에 대지주들의 반발이 거셌다. 김육은 충청도의 토지면적을 정확히 측정한 뒤 결마다 각각 면포 1필과 쌀 2두씩 내면 진상, 공물, 잡세 등을 모두 충당하고도 남는다는 점을 들어 대동법 시행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중앙 공신들의 반대에 밀려 좌절됐다.
<김육 평전>은 효종 즉위 이후 69살의 나이로 우의정에 중용돼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한 과정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소년시절부터 품었던 경세제민의 꿈을 실현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던 김육은 고령과 잦은 병치레로 거듭 사직 의사를 밝히면서도 “대동법은 조세를 고르게 부과하여 인민을 편하게 하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며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으니 충청도, 전라도에 시행하면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에 유익한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호소했다. 반대파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현실론’을 앞세우며 국가의 세입표(貢案)를 개정하는 것이 먼저라는 의견부터 대동법을 시행하더라도 잡세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론이 들끓었고 ‘여론’을 등에 업은 부호들이 반발했다. 김육은 “삼남에는 부호가 많아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며 “어찌 부호들을 꺼려서 백성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 되겠느냐”고 맞섰다. 그는 대동법에 반대하는 이조판서 김집과 공직자의 처신 문제부터 인재 등용 방법까지 건건이 대립하면서도 뜻을 꺾지 않았다. 오죽하면 <조선왕조실록> 중 유명한 인물들을 품평한 <졸기>에도 “김육은 소신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논의할 때 김집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은 불평을 품고 여러 차례 상소하여 김집을 공박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꿈에서조차 선배 관료를 만나 ‘흉년이 들어 대동법 시행이 어려워졌다’며 걱정할 만큼 열정적인 김육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대동법 확대 시행이 성공한 것은 김육의 의지 때문만이 아니다. 서인이면서도 남인 조호익을 스승으로 뒀던 그는 붕당의 이익과 당파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김육은 치열하게 정책공방을 벌였지만 공방한 인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며 “사교적이지 않은 성품으로 정치적 거래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파를 초월해 관료 간 협력의 역량을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이헌창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김육의 공평무사한 성품도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붕당이 굳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김육을 포함해 이항복, 이원익 등 정파를 초월해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김육 평전>은 주로 경제정책에 초점을 맞췄지만, 광해군과 인조반정 등 정치적 격변기를 이끈 주역들, 즉 북인·서인·남인 등 각 붕당의 갈등상도 담담하게 담았다. 자신을 ‘군자 집단’이라고 칭하고 경쟁자 집단을 소인으로 몰아 군자만이 집권해야 한다는 ‘군자 소인론’, 군자는 당이 없어야 한다는 ‘군자 무당론’(붕당 망국론), 모든 붕당엔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기 때문에 흐린 물을 쳐서 맑은 물을 떠올리는 식으로 각 붕당의 군자들로 정권을 구성해야 한다는 ‘격탁양천론’ 등이 경쟁했다. 지은이는 붕당이 사적 이해와 얽혀 있음은 인정하지만, 경쟁 집단과의 공존 문제, 대동법을 비롯한 정책을 바라보는 차이 등이 붕당의 분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김육의 대동법은 붕당정치 와중에서도 초당적인 협력을 끌어냈을 뿐 아니라 후일 경쟁 집단에 의해 계승됐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사례다. 남인 명사들도 김육이 추진한 정책에 협력하고 후원했으며, 김육과 경쟁했던 김집의 제자 송시열은 대동법, 군역제 개혁 같은 김육의 정책을 계승했다.
효종의 굳은 신뢰를 얻었고 탁월한 성과를 냈음에도 김육은 당대 공적이 많은 신하를 기리는 ‘배향공신’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 이후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고 주자학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배향공신 선정이 더 정치적 편향성을 띠었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시대 배향공신에 들진 못했지만, 지은이는 김육을 근세 실학의 선구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집권세력의 무능에 맞선 재야 실학자들도 중요하지만, 김육처럼 도학에 구속되지 않고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을 실천한 재상이야말로 한국 실학의 계보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32411.html#csidxa496f69500c8ba397851e950604d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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