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출처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YMrWEVqclX8
소설을 통해 본 역사, 조선 숙종조 임꺽정의 난.
그런데 그 속에 조선시대의 간척지개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좋은 사례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왕족 등 양반들이 백성들을 쥐어 짜 뜯어가는 한 방편으로서의 '간척'이라는 것.
임꺽정이 살던 황해도 봉산도 갯벌이 많아 임꺽정은 거기에 자라는 갈대를 베어 벙거지 등을 짜 팔아 먹고살았다고 한다.
갈대는 지금도 갈대가 나는 지역 주민들의 소득원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갈대로 엮은 울타리, 자리, 모자, 방석, 심지어는 갈대뿌리를 이용한 건강식품까지.
묵숨줄을 이어 주던 그런 갯벌을 양반들에게 빼앗겼다.
뭔가 다른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한다.
방향이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조선조 당시 여자가 '출가외인'이 된 이유 중 하나,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다는 점.
시집 가 살다가 남편이 죽고 나면 돈벌이 하던 사람이 줄었으니 입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여자를 친정으로 보낸다.
그런데 친정 역시 입이 느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여자는 출가외인이야. 들어오지 말라'고 내친다.
그럼 여자는 어디로 가나?
받아줄 곳 없는 세상, 결국 하직을 한다.
그러면 나라에서 '정려문'(물론 이것도 양반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만)을 세워준다.
이것이 옛날 우리 선조들의 모습 중 하나이다.
그런 팍팍한 삶을 살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조선시대 간척지 개발,
국방력을 키우고자 쌀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극히 일부의 경우 먹을 게 없어 허덕이는 백성들을 위해 시행되었던 일부의 경우를 빼면,
그것은 많은 경우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권문세가들의 치부수단이었다.
역사스페셜 임꺽정 편에 나오는 영암의 지남제(모정저수지).
사재를 털어 당시로 1,000두락, 지금으로 치면 20만평의 간척농지를 확보했다.
당시는 돌 하나, 흙 한 삽도 모든 것을 인력으로 하던 시기.
* 1960년대 후반까지도 간척개발은 거의 모든 것을 인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 1970년 착공한 금강지구, 평택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에 의한 금강하구둑, 아산만방조제, 남양호방조제 건설시에
* 우리나라 최초로 불도저, 덤프트럭 등 중장비가 투입이 되었다.
* 1969년 준공된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이후 그 많은 건설중장비를 쓸 곳이 필요하기도 했던 시기이다.
1. 임꺽정의 난 : 조선 명종 14~17년(1559~1562)
양주 사람 임꺽정이 황해도 봉산에서 난을 일으켜 황해, 강원 북부, 경기 북부 등을 장악하고, 황해도는 조정의 힘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고 한다.
대낮에도 살인, 약탈 등을 하고 사라지고 했다니..
그런데도 그런 그를 백성들과 하급관리들은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정벌하려고 하면 먼저 그 비밀이 새나가 관군이 당하곤 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미루어 짐작을 할 뿐.
종래에는 임꺽정이 한양도성까지 위협을 했다.
당시 한양의 정권실세의 집에까지 직접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2. "임꺽정, 조선의 로빈훗인가"(2006.6.2 방송)
- 3년 동안 국가총력을 기울인 도적과의 전쟁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각인된 임꺽정의 모습은 ‘의적’이다.
그렇다면 역사속의 실제 임꺽정은 어떤 인물일까? 실록에는 임꺽정이 무려 3년에 걸쳐 관군과 전면전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다.
임꺽정의 본거지인 황해도는 공권력이 무력화된 무법지대에 가까웠다.
바짝 애가 탔던 당시 조정의 성화에 공을 세우려는 고을 수령과 토벌군들이 가짜 임꺽정을 잡아 올리는 사건까지 속출했다는데...
- 임꺽정이 도적이 된 이유는 ‘갈대밭’에 있다?
당시 권문세가들 사이에서는 간척지 개발 붐이 인다.
백성들의 터전은 개간의 대상지가 되어 강제로 빼앗겼다.
임꺽정의 주 활동무대였던 황해도 봉산 역시 갯벌로 갈대밭이 무성했던 지역.
특히 이곳의 간척을 주도한 사람은 당대 최고 권력가였던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명종의 외삼촌이었던 윤원형.
간척으로 토지를 확장한 권문세가들은 부를 더욱 축적해가고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져 가는데...
당시 소작농이었던 백성들이 연간 5석 소출에서 소작료 25석, 세금 등을 빼고 나면 5석.
5인 가족 년 필요수량인 17석 대비 12석이 부족했다.
권세가 양반들은 이들 농민들에게 12석을 고리로 빌려주고 거기서도 이득을 취했다.
백성들의 노동력 착취해 간척농지 확보해 이득 보고
그 땅 빌려주어 이득 보고
쌀을 한양으로 내다팔며 이득 보고..
예나 지금이나..
- 조선의 사신, 명나라 과거시험문제에 등장했다?
권세가들은 상인들과 결탁, 간척지에서 생산한 쌀을 매점매석으로 판매해 폭리를 취했다.
대외무역으로까지 확장된 정경유착. 명나라에서는 당시 조선의 사신을 ‘달자’ 라 부르며 장사치 노릇에만 혈안인 사신의 행태를 비꼬았다. 당시 명나라 과거시험에는 이러한 조선 사신의 행태에 관한 시험문제가 출제될 정도. 이렇게 국제적 망신을 당해가며 수입된 사치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 양반들.
16세기 조선판 양극화의 실체를 조명한다.
- 양반지주보다 한 술 더 뜬 왕실의 횡포
당시 왕실의 실권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쥐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20여 년 동안 척신정치를 주도한 절대권력자. 문정왕후는 환관들이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내수사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켜 불법을 자행했다. 명종실록에는 내수사에서 땅을 빼앗은 사례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벼랑으로 내몰린 백성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 명백한 도적 임꺽정, 왜 의적으로 기억되는가?
16세기는 도적을 양산했던 그야말로 ‘도적의 시대’였다.
그리고 임꺽정은 그 많은 도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임꺽정을 의적으로 기억하게 됐을까?
임꺽정을 제압하기 어려웠던 것은 일반 백성이나 하급관료들이 임꺽정을 도왔기 때문이라는데... 그들은 왜 그저 도적에 불과한 임꺽정을 지지했던 것일까?
HD역사스페셜 49회 – 임꺽정, 조선의 로빈훗인가(2006.6.2.방송)
http://history.kbs.co.kr/
3. 15세기 농사짓는 방법 비약적 발전
세종조를 시작으로 조선의 농법 역시 다른 분야와 함께 비약적 발전을 했다.
시비 방법, 이앙방법 등이 발전했다.
* 농사직설 : 1429년(세종 11년) 간행
4. 평택지역에서 본 "궁전(宮田)의 흔적
경기도 평택지역에도 간척의 흔적이 많이 남아았다. 지역 일대에는 '궁'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조선시대, 왕족들이 간척개발을 통해 私田을 만들어 이익을 취하던 곳. 왕족들이 있던 곳의 흔적이다.
"평택의 역사는 ‘간척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1974년 평택호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내륙으로 바닷물이 유입되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갯벌과 황무지가 많았다. 조선후기 간척의 주체는 궁실과 왕족·국가기관·권세가들이었다. 궁실에서 간척한 땅들은 ‘궁방전’이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안성천과 진위천 변에는 궁리·안궁리·신궁리·평궁리 등 궁자가 들어간 지명들이 있어 옛 역사를 말해준다. 지명은 단순히 땅이름이 아니고 선조들의 삶과 역사·문화가 녹아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평택시사신문 2014.2.19자 기고. 평택시 공보담당관실 이호경)
http://m.ptsisa.com/news/articleView.html?idxno=6403
* 평택호 : 공식명칭은 아산호. 평택지역에서는 평택호라고 한다.
1977.3.31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 일원 276만3천여 ㎡ (=83만5800여평)의 관광지 지정 당시, "평택호 관광지"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명에 '궁'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그 곳의 수많은 백성들이 고관대작들의 극심한 수탈을 많이 겪었던 곳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 노동력 갈취해 간척해서 私田 만들고, 그 땅 빌려줘 이익 챙기고, 이리저리 뜯긴 백성들이 먹을게 모자라면 고리로 식량을 빌려줘 또 뺏어 먹고.
조선조 임꺽정도, 장길산도 모두 다 그런 시대적 상황 하에서 발생한 사건의 주역들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임꺽정이 살던 당시, 황해도 재령에서 올라오는 물자를 막기 위해 양반들이 상임들과 결탁해 상선을 싹 사들인 후 한양으로 올라가는 물자의 반송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수도 한양의 물가가 급등. 쌀값이 심지어는 20여배나 뛰기도 했다.
쌀 한 섬에 무명 15필 하던 것이 300필까지 뛰었다니까.
예나 지금이나 있는 자들은 오로지 자기의 것을 지키고 재산을 불리고 하는 것 외에는 안중에 없는 것인지.
그 수탈의 영원한 대상은 역시 백성.
그 백성들의 등골까지 빨아먹던 시기를 적나라 하게 소설로 나타내 보인 것이 임꺽정, 장길산, 홍길동전 등이라 할 것이다.
* 장길산이 살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
그 소설의 첫 장면을 기억하는가?
황해도 장산곶의 음산한 장면이 눈에 보이듯 묘사되며, 이 소설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즉, 양반들의 압제와 수탈에 시달리면서도 살아나고자 애 쓰는 민초들의 이야기이다.
조선 숙종조 13년(1687년)에 기록에 첫 등장했던 장길산. 임꺽정, 홍길동과 달리 그의 종말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즉, 끝내 잡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사람들은 장길산 역시 의적으로 보고 있지 않았던 듯 하다.
물론, 위정자들이 도적을 의적으로 보았을 턱이 없고, 도적을 의적으로 미화시켜 줄 이유도 없었을 터이기는 하지만.
임진, 병자 양란 이후 잦은 기근과 홍수, 지진, 인천에서 황해도로 이어진 적조현상으로 물고기잡이도 큰 피해를 입는 등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에 피폐를 더해 가는데, 당시 희빈 장씨가 득세하여 전면에 나서면서 결국 중전에까지 오르고,
양반들은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 없이 당파싸움만 하고, 그런 혼란의 시기였다.
http://blog.daum.net/crete98/198
임꺽정 이야기에까지 등장하는 '간척'.
지금도 간척은 살아 있는 용광로다.
보존이냐, 개발이냐.
보존으로 본다면,
道路?
내는 거 못하게 해야지.
자연생태계의 축을 끊어버리니까. 그런데 고속도로 없애고 생태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부산서 서울까지, 말타고 보름 안걸릴걸?
길가에 소똥, 말똥 다시 생기면 말똥구리도 다시 살아날 수 있어.
공장, 대규모 택지개발도 하지 말아야지.
거기 살던 온갖 동식물들 다 죽어 없어지는데? 농사짓던 분들 삶의 터도 없어지지,
공단, 택지지구에 사람 모여 득실대니 오하수 등 도시문제 생기지..
그런 공단, 택지지구 없애고 자연으로 환원하자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저수지, 댐도 만들면 안된다.
농지 없어지지, 물 흐름이 끊어지니 하천도 죽어가지.. 안동댐 담수로 없어지는 내성천 봐바. 내성천을 살리려면 안동댐은 없애야 하는거야.
영산강 하구둑, 긍강하구둑, 낙동강 하구둑 모두 다 없애야 해.
4대강 중간에 만든 보, 모두 없애야 해.
물은 흘러야 하는거야. 그래야 물이 살고, 냇물이 살고, 강이 살고 바다도 사는거야.
유엔의 지속가능발전 17개 테마 중
'6번째가 깨끗한 물과 위생, 13번째가 기후변화 대응, 14번째가 건전한 해양 생태계, 15번째가 건정한 육상 생태계' 아닌가?
개발로 해서 더럽히면 안돼.
그냥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 역시 자연의 한 일원일 뿐, 더럽히면 안돼.
그냥 먹고 살만큼만 먹고 쓰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좋은거야. . . . . .
물?
없으면 생수 사먹으면 되지.
지하수 없어?
수입해 먹으면 되지.
삼면이 바다인 나라인데 해수 담수화 해서 쓰면 되지. . . . .
* 이런 주장 하는 사람들, 이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70년대 2차 오일쇼크 당시, 우리나라는 쌀을 국제시세의 3배를 주고 사와야만 했다.
국제 곡물메이저들이 싸게는 안팔았으니까.
(우리는 단립종인 자포니카 계열 쌀을 먹어야 하는데, 그 재배량이 적다. 자포니카 10%, 인디카(소위 알랑미라고 했던) 90% 정도))
간척 이야기 하다 샛길로 빠졌는데,
'간척'하면 개발을 뺄 수 없고, '개발'하면 자연환경 훼손과 보존의 양립 문제를 뺄 수 없다.
임꺽정 이야기에 등장하는 간척은 거기에 하나 더 엊은 이야기이다.
그 뒤에 숨은 것은, 이중삼중으로 착취만 당했던 당시 민초들의 팍팍했던 삶이다.
그런 민초들이, 나라 위기 때면 조정보다 먼저 들고 일어나 나라를 지켰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 IMF 때 금 모으기 운동 ...
모두 이름 없는 서민들의 힘 모으기였다.
그게 우리 사회의 원동력이자 저력.
역사에 이름은커녕 왔다갔는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匹夫匹婦들,
그들이 우리 역사를 지탱해 온 진정한 힘이다.
지금의 위정자들도 진정 이 점을 알고 제대로 좀 해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