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레이디경향 입력 2014.01.07 14:20
http://media.daum.net/life/outdoor/travel/newsview?newsId=20140107142008136&RIGHT_LIFE=R7
[함께 걷는 길]산과 호수, 옛이야기를 만나다
ㆍ경기 삼남길
흰 눈에 모습을 감춘 길은 숲으로 마을로 이어지다 어느새 수백 년 전 역사 속으로 여행자를 데려다 놓았다. 고요하게 눈 덮인 삼남길. 로드플래너 손성일·강주미 부부와 2014년 첫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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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6대 대로 중엔 삼남대로라는 길이 있었다. 한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까지, 삼남 지방을 이었던 천 리의 길고 긴 길이다. 조선시대 육로 교통의 중심축이었던 이 길은 과거를 보러 가던 젊은 선비들이 걸었고, 삼남 지방의 풍부한 물자가 오갔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화성 현륭원을 다니던 길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땅끝까지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길이니 그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가 오죽이나 많을까.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 아스팔트 아래 묻힌 옛길이 최근 도보 여행길로 복원되며 되살아나고 있다. 2012년 4월 전라도 구간(228km)이 개통됐고 지난 5월에는 경기 삼남길(91km)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 충남 구간과 전북 구간이 연결되면 서울에서 해남까지 장장 600km에 이르는 도보 여행길이 열린다.
이 대장정의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주역 가운데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표와 강주미 실장이 있다. 잊히던 옛길을 찾아 먼지를 털고 선을 이은 주인공들이다. 2014년 새해, 눈 덮인 경기 삼남길을 두 사람과 함께 걸었다. 길에서 만나 길에서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 이보다 더 좋은 동행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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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기로 한 날 아침, 코스 출발지에 도착하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일부러 눈을 피해 고른 날인데 보기 좋게 예보를 비껴간 셈이다. 굵어지는 눈발에 슬금슬금 걱정이 고개를 들다 이내 마음이 편해진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도보 전문가와 함께하는 길인데 무엇이 걱정일까 싶다. 장비를 점검하고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속으로 길을 나섰다.
경기 삼남길 중 세 번째 코스인 모락산길은 조선시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이들이 걷던 길이다. 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에서 시작돼 임영대군의 묘역을 지나 모락산 동쪽으로 이어지는 12.6km의 코스. 남태령부터 수원, 화성, 오산, 평택까지 이어지는 경기 삼남길 중 가장 다채롭고 다이내믹한 길로 꼽힌다.
"이 길은 호수와 마을, 곳곳에 숨어 있는 문화 유적지까지 둘러볼 수 있어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1백 년간 6명의 정승을 배출한 청풍 김씨, 정조까지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요."
삼남길은 삼남대로의 옛 노선을 연구·고증하고 최대한 그 원형을 따라 만들었다. 역사적 인물들이 정계에서 밀려나 남도의 섬이나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는 길이기도 했고, 지방으로 장터를 옮겨 다니던 보부상들과 민초들의 애환이 담긴 길이기도 했으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던 원행길이기도 했던 길 곳곳에는 수많은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고속도로 등으로 단절된 구간이나 도보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구간은 따로 대체로를 개척했다.
손 대표가 처음 삼남길 개척에 나선 것은 2008년부터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2006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 목적을 위해 걷는 길이 아닌 걷는 것이 곧 목적이 되는 길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삼남길 개척을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도로 포장이 덜 된 호남 지역의 옛길을 주목했고, 운영하던 도보여행 카페 회원들과 해남 땅끝에서 강진까지 길을 닦고 표지판을 만들었다. 강 실장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함께 길을 만들며 6년간 동고동락해온 두 사람은 지난 10월 경기 삼남길의 시작점인 남태령 길 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다운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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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맞으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막 내린 새하얀 눈은 길과 숲에 살포시 내려앉아 온 세상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눈 오는 날 산행이 나쁘지 않다고 하니, 옆에서 걷던 강 실장이 비를 맞으며 걸어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보통 눈이나 비가 오면 산행을 꺼리는 분들이 많은데 세찬 비가 아니라면 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상당히 좋아요. 우비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참 기분 좋게 하거든요."
강주미 실장은 건강을 위해 걷기를 시작했다가 길 사람이 된 케이스다. 몇해 전 무릎 수술 이후 한 정거장도 채 걷지 못했을 정도로 약했던 다리가 걸으면 걸을수록 거짓말처럼 나아지는 것을 경험하고 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정거장이 10km가 되고 10km가 수백 km가 됐다. 길 위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1주일에 나흘을 길 위에서 사는 손 대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자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이 돼주는 조력자다.
"보통 1km의 길을 만들려면 그 10배에 해당하는 길을 찾고 걸어요. 최대한 인위적인 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 숲길과 마을길, 농로, 해안길 등을 연결하죠. 경기도 구간에는 예상과 달리 숲길과 농로가 많이 남아 있어요. 걷기 좋은 숨은 길들도 많고요. 도시에 살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게다가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길이라 더욱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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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맛보는 소박한 시골 밥상
언덕을 넘은 길은 이내 작은 시골 마을로 이어진다. 용머리와 목배미, 사나골, 백운동 등 작은 마을들로 이뤄진 오매기마을은 마을의 산세가 다섯 마리의 말이 각자 기수를 등에 태우고 달리는 형상이라 하여 '오마동'이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의왕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이지만 산과 어우러진 고즈넉한 마을 풍경이 어린 시절 뛰어놀던 외갓집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 슈퍼마켓에서 팔고 있는 주전자에 담긴 오봉막걸리가 등산객을 유혹한다. 마을 밥집에서 슴슴한 나물과 구수한 된장찌개, 뜨거운 숭늉이 꿀맛인 소박한 한상차림을 맛본 뒤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앞장서는 부부의 뒷모습 위로 어느새 눈은 그치고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올해 충청 구간과 전북 구간 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는 두 사람은 무척이나 바쁜 한 해를 보낼 듯하다. 서로의 속도에 맞춰 맞잡은 손, 2014년 함께하는 길이 시작되고 있다.
Tip 경기 삼남길 3코스 모락산길 (12.6km, 예상 소요시간 4시간)
백운호수-임영대군 묘역-오매기마을-김징 묘역-사근행궁 터(고천동주민센터)-골사그내-지지대비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조민정 ■취재 협조 / (사)아름다운 도보여행 ■의상 협찬 / 코오롱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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