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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구술 아카이브즈

by 아름다운비행 2011. 4. 19.

 

4월혁명 구술 아카이브즈

 

4.19 직후,

후세에 역사로 남기기 위하여 실제 현장에 잇었던 사람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남긴 현장기록.

 

연합뉴스는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4.19 당시 연세대 학생이었던 김달중(73)씨와 안병준(73)씨는

   4.19 직후 일반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시위 주동자ㆍ부상자 면담조사도 시행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2개월에 걸쳐 수집ㆍ정리한 자료를 후세 학자들에게 남기고자 10년 동안 비공개로 하고,

   개인적 연구 목적 등으로 절대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미국대사관이 "(자료를) 한국에 두는 것보다 미국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자료 요청을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연세대 도서관 희귀자료실에 봉인해 보관했다고 전했다.

 

후세를 위한,

바른 역사 정립을 위한

두 분의 노력에 머리 숙여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아래는 구술아카이브즈 첫화면.

 

http://oralhistory.kdemocracy.or.kr 

 

 

 

아래는 이 역사기록을 소개하는 연합뉴스의 기사.

 

<4.19 참가자들 생생한 증언 인터넷 공개>(종합)

치과의사ㆍ전 IOC부위원장ㆍ언론인 등 105명 수록

(서울=연합뉴스) 한상용 기자 = "맞으면 맞았지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간디 사상가처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4.19혁명 51주년을 하루 앞둔 18일 치과의사 이병태(69)씨 등 혁명 참가자들의 증언이 담긴 '4월 혁명 구술 아카이브즈'를 공개했다.

   '구술 아카이브즈'는 인터넷을 통해 4월 혁명 참가자들의 증언 장면을 직접 볼 수 있는 웹페이지이다.

   이병태씨는 인터넷 증언에서 1960년 4월 혁명 당시 동성고 3학년 학생이었던 자신이 뿌린 '경찰은 학생에게 폭력을 금하라. 민주주의를 지킬 뿐이다. 무저항주의"란 내용의 유인물을 꺼내 보였다.

  이씨는 "교무실에서 학교 등사기로 이 종이를 직접 만들었다. 시위대가 가는 곳에 이것을 뿌렸다. 이걸 대학로까지 뿌렸다"며 학교가 유인물 용지 등의 사용을 묵인해줬다고 증언했다.

   4.19 당시 연세대 학생이었던 김달중(73)씨와 안병준(73)씨는 4.19 직후 일반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시위 주동자ㆍ부상자 면담조사도 시행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2개월에 걸쳐 수집ㆍ정리한 자료를 후세 학자들에게 남기고자 10년 동안 비공개로 하고, 개인적 연구 목적 등으로 절대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미국대사관이 "(자료를) 한국에 두는 것보다 미국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자료 요청을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연세대 도서관 희귀자료실에 봉인해 보관했다고 전했다.

   김운용(80)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게 된 배경을 소개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4월26일 아침 송요찬(계엄사령관)이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마지막 건의를 했다"며 "발포 안 하면 수습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이승만은 '발포는 안 돼, 국민이 무엇을 원해?'라고 물었다"고 전했다.

   이에 "송 사령관이 '하야하시랍니다'라고 하자 '그럼 하야하지'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4.19 혁명 당시 김 전 부위원장은 송 사령관의 전속 부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또 "4월 혁명이 학생, 시민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지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이 절대적으로 올바른 태도로 사태를 수습했기 때문"이라며 송 사령관이 4.19 당시 병력 지원 요청을 거부한 내용 등도 전했다.

   아울러 김 전 부위원장은 "당시 계엄군이 치안을 장악한 후 자유당 차원에서 경찰의 무력 사용을 계획했던 것 같다"며 "경찰 측에서 육군에 칼빈 총탄 10만발을 요청해 왔으나 송 사령관은 이를 거절했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4.19 당시 현장을 경험한 일반 시민과 기자의 생생한 목소리도 '구술 아카이브즈'에 담겨 있었다.

   당시 이발사였던 정동채(74)씨는 "광주지역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이발관 손님한테 전해 들었다. 근무시간이 끝나고 시위대를 따라 금남로를 지나 광주경찰서 앞까지 갔다. 밤 9시40분경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고 주변에서 시위대가 쓰러졌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도망을 못 가고 서 있다가 경찰에게 곤봉으로 여러 곳을 타격당한 후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졌는데 치료를 받지 못하고 경찰서에 연행됐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육군77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중 이승만 대통령 하야 소식을 듣게 됐고 이후 위문품이 전달됐다"고 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경무대 앞 총격 장면을 찍었던 이명동(81)씨도 4.19 당시 상황을 현장감 있게 묘사했다.

   그는 "4월19일 경무대로 진격할 때 어린 학생들이 소방차 두 대에 시동을 걸자 자동적으로 사이렌이 켜졌고 이들이 죽으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봐야 겠다는 심정으로 따라가며 셔터를 눌렀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총소리가 나고 소방차에서 떨어진 학생한테 깔려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큰 부상 없이 카메라 렌즈만 찌그러져 있었다. 회사로 와서 쓸만하면 쓰라며 카메라를 던져줬다"고 말했다.

   '구술 아카이브즈'는 이밖에 서울과 경기, 부산, 제주 등 당시의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 언론인, 군인, 재판관 등 105명이 17개 과제별로 181시간에 걸쳐 증언한 내용을 소개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증언자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자료만 담고자 구술자들의 현재 직함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gogo213@yna.co.kr
   2011/04/18 21:02 송고
   * 출처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4/18/0200000000AKR20110418196500004.HTML?did=1179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