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우리는 로켓강국이었다
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14세기 최무선 등 초기로켓 발명
홀대받는 科技인물 위상 높여야
인공위성을 실은 북한의 로켓발사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연일 전해지고 있다. '평화적인 우주 이용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면서 북측은 미사일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어느 경우거나 그 근본은 로켓에 있다. 고온 고압의 가스를 내뿜어 그 반동으로 추진되는 장치,즉 로켓이 기본이다. 그 힘으로 무기나 인공위성을 띄우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로켓의 시작은 1377년 고려의 최무선(1325~1395년)의 주화(走火)로 올라간다. 화약의 추진력으로 화살을 쏘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조선 초에 특히 발달했던 신기전(神機箭)은 그 발전된 모습이었다. 물론 이런 로켓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유치했다. 하지만 벌써 6세기 반 전이다. 당시로서는 중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업적이니 자랑해서 부족할 것이 없다.
근대적인 로켓은 서양 사람들에 의해 처음 개발됐다. 우리는 일제 시대에 겨우 그런 소식을 알리려는 노력이 있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최규남(1898~1992년)은 1936년 5월 신문에 '장래(將來)할 로케트시대'라는 제목 아래 5회 연재를 했는데,"달나라 여행도 머지않다"며 세계의 로켓 상황을 소개했다. 그는 1933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조선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부터 연희전문 교수로 있었다.
이런 계몽 단계를 거친 다음 한국인이 진짜 로켓 실험을 하게 된 것은 1958년의 국방과학연구소,1959년의 인하공대를 들 수 있다. 이 시기 한몫했던 인물에 위상규 박사(1926~2008년)가 있다. 1962년 8월2일자 동아일보는 그의 강연을 소개하고 있는데,미국의 글렌 중령이 지구 궤도를 3번 돌고 돌아온 우주선 '우정' 7호가 서울에서 전시되던 때였다.
지금 한국에는 14개 대학에 항공우주공학 학과가 있고,한국항공우주학회가 활발하다. 1989년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이 대덕에 세워졌고,그에 상응하는 산업체도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5월쯤 과학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릴 계획이다. 2007년 완공된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우리 로켓 기술로 쏘아 올리는 첫 위성이 된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몇 가지 역사적 사실 어느 경우도 오늘날 항공우주공학 관련자들로부터는 외면당하고 있다. 최무선,최규남,위상규,또는 그에 상응할 만한 어느 인물의 이름도 관련기관의 홈페이지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KARI 홈페이지에는 그나마 '우리나라 우주개발의 역사'가 있고,거기에 "한국 최초의 현대식 로켓은 1958년 국방과학기술연구소에서 개발됐다"로 시작되는 약간의 설명이 있다. 1961년 국방과학연구소가 사라지면서 로켓 개발도 중지됐다는 설명이다. 또 인하공대의 경우는 당시 병기공학과에서 로켓실험을 했다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누가 그 일을 했던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또 오늘날 인하대 항공우주공학과 홈페이지는 1972년 설치된 학과라면서,그보다 10년 앞선 병기공학과의 로켓에는 무관심이다.
하기는 옛날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은 여간 고질이 아니다. 지난해 12월10일 위상규 교수가 작고했을 때 몇 신문은 그 사실을 보도했다. 그가 서울대 명예교수로,한국 최초의 항공공학 박사이며,1967년 항공우주학회 초대회장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홈페이지에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장례에서 위상규 교수의 영정은 골프 스타 미셸 위(위성미)가 들었고,그 사실이 매스컴의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그가 지하에서 어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흐뭇하면서도 조금은 서운하리란 느낌도 든다. 과학기술자를 대중적 스타만큼 띄울 수는 없겠지만,적어도 그 분야에서만은 더 많은 이름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과학기술계도 뿌리 찾기에 더 성의를 보였으면 좋겠다.
한국경제신문, 입력: 2009-03-01 17:32 / 수정: 2009-03-02 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