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40. 고여 우문국 화백 - 항도화단 '문화의 꽃' 피우다

아름다운비행 2006. 2. 28. 17:48

[인천인물100人·40] 고여 우문국 화백

항도화단 '문화의 꽃' 피우다

임성훈 기자 / 발행일 2006-02-16 제0면 

 

>40<  고여 우문국 화백

 

1998년 6월16일부터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던 한 원로화가의 회고전이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러나 정작 화가는 전시회 기간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뇌졸중으로 5년째 병상에 누워있는 처지였다.
이 전시회는 해방 후 평생을 인천화단의 발전을 위해 몸 바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배 화가들과 대학교수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그만큼 원로화가는 인천 미술계의 큰 별이었다.

그리고 전시회가 끝나고 한달 가량이 지난 후 그 원로화가는 82세를 일기로 정열적이고 파란만장했던 예술인생을 접었다. 고여(古如) 우문국(禹文國, 1917~1998).

화가로서 모두 18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것은 물론, 초대 인천문화원장, 인천시립박물관장, 미술협회 고문, 문필가 등으로 활동한 해방후 인천 미술의 지도자였다.
우 화백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21세 때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9년간 동·서양화를 익혔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 검여 유희강을 만나게 되고 1946년 유희강과 함께 귀국한다.

귀국후 시천동 검여의 집에서 숙식을 하던 우 화백은 할 일을 찾아 서울 인천 등지를 돌아보던 중 '시립 우리예술관'(현 파라다이스호텔 인천 자리)을 찾게 되고 상설화랑 및 음악연구실, 카페 등이 갖추어진 이곳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 해경 /스페이스 빔 제공. 도록에서 발췌.


“네모난 단층집 방이 구자(口字)로 둘러있고 음악실에선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며 남향한 몇 개의 방은 상설화랑으로 국내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중략> 분위기도 조용하고 전망도 좋았다. 서울에도 없는 이런 문화시설을 가진 인천시민을 부러워했다.”(인천상의보. 1970)

 

그는 '시립 우리예술관'을 둘러보고 나서 38선이 열리지 않을 경우 인천에 정착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수년 후 인천에 정착을 하고 시립 우리예술관을 다시 찾았을 때 예술관은 좌익 예술인들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시립예술관의 폐쇄는 그가 “사기를 당한 느낌이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에게 극도의 실망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 화백은 실망에 그치지 않고 예술관을 부활시켜 보겠다고 나섰고, 이는 우 화백이 문화운동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예술관의 폐쇄로 좌익계열에 대해 분노를 느낀 그는 1949년 문인연합 총회의 전신인 인천예술인협회의 발족을 주도, 해방후 처음으로 인천에 우익 문화단체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고 1950년에는 구국대를 결성해 부대장으로서 좌익 계열 문화단체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 화백은 이어 1955년 유희강이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박물관에 문화원이 설립되자 초대 인천 문화원장으로 취임, 1959년까지 문화원을 이끌면서 초기 문화원의 기반을 닦았다.

특히 1966년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한 우 화백은 박물관을 알리고 박물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생전에 쓴 '나의 공무원 생활'(1969)이란 글을 보면 '음침한 골동품으로서 자체가 진열장에 들어가야 할 운명'인 열악한 박물관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나는 건물수리 때에 나온 낡은 판자와 각재를 모아 (박물관의) 입간판을 세우기로 했다. 나는 이 일을 하는데 몇 몇 안되는 직원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며칠이 걸려 세 개의 입간판을 완성했다. 직원들은 나의 이 행위가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만 있었다. 요소(要所)에다 세운 이 입간판들은 제법 선전효과를 나타내 예년에 비해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였다.”

▲ '비천도'. 패분화로 우문국 화백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스페이스 빔 제공, 도록에서 발췌

 

그는 우여곡절끝에 박물관을 개수(改修)하고 국립박물관에서 보물급의 고려청자를 비롯, 30여점의 귀중품을 빌려 '건물개수기념 특별전시회'를 열면서 전시기간 전시실에 의자를 모아놓고 숙직을 하기도 했다. 직원들과 교대로 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귀중한 문화재를 대여받은 책임감은 그에게 박물관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3년간의 박물관장 임기를 마감하고 나서는 인천여고 국민대학교 등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한편 미협 이사로 인천 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인천화단을 지켰다.

화가로서 그의 삶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서양화에서 한국화, 여기에서 다시 패분화, 그리고 다시 한국화로 돌린 그의 예술편력은 지금도 미술계에서 회자된다.
이경모 미술평론가는 우 화백이 작고한 뒤 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고여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소개했다.

“고여의 작품세계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서양화적 공간구성과 입체감의 표현 그리고 기법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수묵(담채)화는 80년대 초에 절정기를 맞는다. 특히 1981년 제작한 횡폭의 산수화는 말끔한 선과 절제된 준법, 현대적 채색과 공간구성 등 소상팔경 중 '원포기법'을 연상케 하는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수작이다. 특히 만년의 작품들은 대담한 축약과 절제된 표현으로 일종의 선기(禪氣)마저 풍기고 있다.”
우 화백의 작품세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패분화'(貝粉畵·조개껍질을 곱게 가루를 내 매체로 사용하는 그림)다.

그는 한때 패분화에 집착했는데 그 이유가 그의 글에서 드러난다. “패분화를 시작한지 이년째 접어들었다. 패분화가 회화냐 공예냐 하는 논의는 평론가나 사가(史家)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선 패분화가 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개척되었다는 것을 외국에 인식시키고 이것을 더 연구 발전시켜 재료에 적응한 패분화의 스타일을 제시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자화상, 1968)

이렇듯 예술인으로서의 우 화백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 했던 도전자였으며 집에서 나와 홀로 송도로, 강화로 떠돌던 자유인이기도 했다.
또 문필가로서 상당한 필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많은 글을 남겼는데 다음은 그가 77세에 쓴 '고개를 넘으며'.

“지루하고도 짧은 세월 허우적 허우적 땀흘려 오른 일흔일곱의 고개 돌아보면 지나온 발자국 보이지 않네. 그러나 지금 돌밭에서 거둔 이삭 몇 줌 이 자리에 모아보니 어설프나 즐거워”

 

임성훈·hoon@kyeongin.com / 2006. 2. 16

출처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41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