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4 - 인천 개항기

[해방기 격동의 현장 인천] 8. 발 묶인 과거… 떠도는 일제망령

아름다운비행 2005. 12. 2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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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 전국의 책임자들이 회의를 마치고 사진촬영한 모습.


>8·끝< '친일잔재 청산'바람

 해방 이후 가장 주목할 부분은 친일잔재 청산 작업이다. 이 친일잔재 청산은 반민족행위자를 찾아 내 처벌하는 것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아직도 친일잔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만큼 해방 직후 친일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로, 해방기 가장 격동의 지역으로 꼽혔던 인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표적 친일인사들이 행정과 경제계를 장악하기도 했다. 친일청산이 완벽하게 진행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인천에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된 것은 1949년 2월 25일이다.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지역의 친일인사 색출작업이 본격화했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친일인사들이 잡혀들어 왔지만 반민특위 위원이 친일논란에 휩말려 위원직을 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인천 반민특위은 5개월 정도 활동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21명을 조사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인천지역에서 발행되던 일간지 대중일보는 1949년 3월 9일자에서 '반민특위 인천지부가 개설된지 벌써 2주일. 그동안 관선 중추원 참의(경기도의원) 김윤복과 헌병군조 이필순 등 2명이 자수해 나왔을 뿐 인천지부 자체로서는 어떠한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않고, 다만 정보수집에만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반민특위의 초기활동이 미흡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 신문은 또 이날부터 반민족행위자 검거에 착수할 것이란 내용을 전하면서 일제시대에 나왔던 간행물들을 수집해 일제에 협조한 사람들을 찾을 것이라는 반민특위 활동의 방향을 밝히고 있다.

 이 때 전국적으로는 61명을 적발했다. 중앙의 반민특위가 구체적으로 반민자를 체포하기 시작한 것이 1949년 1월 8일었다고 하니 두 달 동안 하루에 한 명씩 적발한 셈이다.
 인천 반민특위는 1949년 2월 18일에 인천부청(시청) 정문에 반민족 행위자 고발 투서함을 설치했다. 이 투서들이 반민족 행위자 검거의 단초였던 셈이다.

 3월 초 이 투서함을 처음으로 여는 날에 맞춰 2명이 반민특위에 자수한다. 선처를 바란 것이다. 일제시대 중의원 참의를 지낸 김윤복과 일제 때 강제징용 업무를 맡았던 인천부노무협회 지도주사 이필순이었다. 반민특위에서는 이들에 대한 구속여부를 상부에 물었는데,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불구속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투서함의 첫 개함이 3월 5일 낮 12시에 있었는데, 반민특위는 고발장이 몇 장이 접수됐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상당한 분량'이라고만 발표했다고 한다.

 대중일보 3월 13일자는 반민특위의 인천의 친일거두 김태훈을 검거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신문은 '지난 11일 오전 11시 반민특위 인천지부 권성오 조사관이 지휘하는 특경대가 인천의 친일거두 김태훈을 체포하자 그가 사장으로 있는 서울 조선도량형기회사로 찾아갔으나, 외출 중이어서 수소문 끝에 은행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은행에서 그를 체포했다'고 적고 있다. 이 때 김태훈은 약간 당황하는 기색만 보였을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해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대중일보 3월 2일자는 '이건 또 무슨 짓?'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왜제에게 아부하여 민족을 판 친일도배에게 숙청단죄의 쾌도가 번뜩이고 있는 오늘, 이건 또 무슨 필요에서 인지 '나는 민족반역자가 아니요'라는 증명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인천 반민특위가 활동을 지작하자 마자 시민 1명이 반민족 행위자가 아니란 증명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반민족 행위자를 적발해야 하는 조사관들은 정반대의 요구를 받고 본부에 어떻게 해야할 지를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반민특위는 친일인사들을 체포해 조사한 뒤 그들의 죄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인천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초까지 활동했고, 8월 13일에는 당시 표양문 시장 등 5명이 반민특위 관련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어찌됐든 이런 반민특위의 활동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표적 친일인사로 평가되는 김활란과 갈홍기, 김은호 등은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해방기 친일잔재 청산이 깔끔히 안된 데는 당시 인천시민의 '무성의'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 4월 23일자는 '시민들의 무성의로 왜색잔재가 여전하다'는 취지의 기사를 싣었다. 4월 20일부터 시, 경찰 등이 합동으로 '왜색잔재소청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여전히 거리 간판이나 플래카드 등의 문구는 일본식 말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아무리 강력한 (일제잔재 청산)운동을 펼친다고 해도 시민의 협력없이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화여전 교수를 지낸 김활란은 주요 친일단체 임원으로 학도병 독려를 위한 순회강연을 여러 차례 가진 친일인사였지만 이승만 정권 아래서 주미대사에 임명되는 등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또 연희전문학교 교수이던 갈홍기도 사상보국연맹 인천지부장을 맡아 일제에 부역했지만 역시 기소되지 않았다.

 인천지역 친일 인물 연구작업을 벌이고 있는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반민특위의 활동에 의해 체포된 21명 중 검찰에 송치한 경우는 고작 12명이었다. 이 중에서도 구속자는 불과 3~4명에 불과했다”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 여전히 친일문제를 일으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제라도 지역의 연구자들이 중심이 돼 친일인사 파악과 친일잔재 문제에 대한 근본적 접근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5.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