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12. 독립운동가 윤응념

아름다운비행 2005. 8.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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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의 결심공판 모습을 전한 동아일보 1923년 9월 19일자 기사의 사진(선두에 선 사람이 윤응념이다).


1923년 9월18일 오전 9시30분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 한 젊은이가 우뚝 섰다.
 
서슬퍼런 일제 법정에서 이 젊은이는 검사의 심문에 당당한 어조로 자신의 혐의 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그러나 검사가 자신을 파렴치한 강도로 몰아가는 데 대해선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민족에게 위해(危害)를 가한다면 그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근본 뜻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누구도 희석시키지 못할 신념이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이 젊은이의 뒤에서 심문을 기다리던 8명 '동지'들도 결의에 찬 눈빛으로 젊은이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1923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의 결심공판은 이처럼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당당히 정당성을 외치는 한 젊은이와 일제 검사간의 날카로운 신경전속에 진행됐다.
 
당시 27살에 불과했던 이 젊은이는 바로 인천의 부호들을 전율케 했던 독립운동가 윤응념(尹應念·1896~?)이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있으켰는지는 '조수(潮水)같은 청중 중에 인천사건 공판'이란 제목으로 결심공판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잘 나타난다.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대대적으로 군자금을 모집한 윤응념 일파에 대한 공판은 예정과 같이 지난 18일 오전 9시 반에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리었다. 시간 전부터 군중은 사면으로 모여들어 방청석은 터지고 넘칠 듯이 되었으며 그 위에 입장하지 못하고 섭섭히 그만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아니하다.(중략) 윤응념부터 심문을 시작하였다. 피고는 사실 전부를 가리움 없이 모두 승인하였으나 다만 자기가 군자금을 모집할 때에 권총을 겨누고 돈을 내지 아니하면 죽인다고 협박하였다는 것은 전혀 무근한 사실이라, 자기는 조선민족을 위하여 다만 그들에게 동정을 구하였을 뿐이니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민족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근본 뜻을 일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것만은 변명을 하였는데(하략)'(동아일보 1923년 9월19일자)
 
당시 '인천사건', '인천의 중대사건'으로 시시각각 보도된 이 사건은 인천항 부근의 영종·대부·장봉·시·신불도 등 섬의 부호들을 상대로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집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독립운동가는 윤응념을 비롯, 이호승(43·1923년 당시 나이, 이하 동일), 이동진(25), 윤경중(27), 송중식(35), 최수연(26), 김순창(31), 장수태(45), 김유근(48) 등 모두 9명이었다.
 
마지막까지 체포되지 않은 김원흡은 해방 후 이국에서 금의환향했는데 '대중일보'가 사건 후 24년이 지난 1947년 3월1일 '윤응념, 김마리아 사건의 혁명투사 김원흡씨 귀국'이란 제목으로 김원흡의 귀국사실을 소개한 것만 보더라도 이 사건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중량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윤응념은 서울 출생(?)으로 황해도 재령(載寧)에서 그리스도교도로 독립운동에 참가, 김마리아 등을 국외로 탈출시키고 1923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사(參事)로 있으면서 '독립단'을 조직, 단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인천에 잠입했다가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고 병보석 중 중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응념의 항일 행적에 대해선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된다.
 
'윤응념은 지금으로부터 6년전에 중국 지부(芝●)로 건너가서 영어를 연구하다가 대정 8년에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교통부 참사가 되어 가지고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대정 9년 9월에는 '독립신문'과 '신한공론'을 가지고 조선에 건너와서 배부한 일이 있으며 다시 10년 4월에는 중국인으로 변장을 하고 조선에 와서 임시정부 비서국장 도인권의 처자와 대한 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인천으로 데려다가 그 해 7월20일에 풍범선을 타고 인천 근해에 있는 '초치도'에 상륙하였다가 그 날 저녁에 이미 약속하였던 인천을 떠나 '위해위'로 가는 중국배를 타고 위해위를 거쳐 상해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지부에서 미국인회사에 있다가 작년 3월에는 다시 임시정부 교통총장 손정도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가지고 대활동을 하게 된 것이더라.'(동아일보 1923년 5월20일자 '인천을 중심으로 한 중대사건의 진상')
 
1919년 수립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을 두고 국내 민족운동을 진작시키려 노력했는데 교통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설치한 비밀 연락조직이었다.
 
윤응념은 교통국 참사로서 민족지사와 그 가족을 망명시키는 일을 담당하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임시정부의 인천지역 조직책이었던 셈이다.
 
인천의 민족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열혈청년 윤응념.
 
윤응념은 그러나 아직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채 역사속에 묻혀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제 후손들이 그의 발자취를 찾아야 할 시점이다.

-윤응념과 관련된 기관 및 인물들
 
▲교통국
 
윤응념이 참사로 활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설치한 비밀 연락조직.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는 국내와의 연락 요충지인 안둥(安東)에 교통부 안둥지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국내 각 군(郡) 단위로 교통국, 각 면 단위로 교통소를 설치해 국내와의 교통통신 및 독립운동자금의 모금을 담당토록 했다.
 
▲김마리아(1884.6.18~1945.3)
 
윤응념의 도움으로 국외로 망명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다.
 
1910년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의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의 여학교를 거쳐 도쿄의 메지로 여자학원 전문부에 입학했다.
 
1919년 귀국, 황에스터와 함께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체포됐으나 면소(免訴)돼 모교에 복직했다. 그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었으나 비밀조직의 탄로로 1920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이듬해 상하이(上海)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사(大議士)와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근화회(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독립단
 
1919년 3·1운동 이후 평양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로 만주·중국 일대를 왕래하면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이동녕, 이시형 등과 연결되면서 활동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연통제와 교통국의 비밀조직을 통해 임시정부와 중국·만주 일대의 정보를 국내에 전해 즉시 투쟁을 실현하거나 국내의 각종 정보를 임시정부와 만주 일대에 전달하기도 했다.
 
군자금을 500여회나 모금, 약 3천원의 현금을 임시정부와 만주·북중국 일대에 조달했으며 각종 무기와 탄약 등을 구소련 등에서 반입, 만주의 독립군 부대나 임시정부에 조달했다. 윤응념이 창단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터뷰] 이희환 인하대 국문학과 강사

“윤응념은 3·1 운동 이후에도 인천이 민족운동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인하대 국문과 강사인 이희환(39·인천도시환경연대회의 집행위원장)씨는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역사”라며 윤응념이 인천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이같이 설명했다.
 
이씨는 인천문화정책연구소에서 인천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한 결과를 토대로 '굿모닝 인천'(2003년 9월호)을 통해 인천에서 윤응념이란 인물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주인공이다.
 
그는 “윤응념이 주도한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은 식민지 시대 인천의 역사중에서 인천 민족운동의 한 긍지로 기억해야 할 사건”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역사에 대한 온전한 해석은 고사하고 아직도 지난 과거의 실상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실제로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과 윤응념은 '인천광역시사'에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는 이어 “인천의 항일운동사는 신간회 운동, 인천보통학교 학생들의 3·1운동, 황어장터 만세운동 등에 대한 단편적인 소개가 고작으로 신간회 운동의 경우, 제대로 연구된 논문조차 없다”며 “지역에서도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윤응념 등 무관심속에 묻혀있는 인물들을 발굴,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식민지 시대를 거쳐 급격하게 근대도시로 성장한 인천 지역에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 훨씬 많은 친일파들이 존재했을 것”이라며 “식민지 시대 '일본인의 도시'였던 인천에서 활약한 윤응념을 계기로 친일파에 대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민족계열 뿐만 아니라 좌익계열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고 더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서의 인천, 가령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도 역사적 논의를 바탕으로 논쟁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인천이 뭐가 첫째다'식으로 외면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며 인천의 역사를 해석해선 안됩니다. 감추어진 역사를 이제 후손들이 찾아야 할 때입니다.”
 
과거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즈음, 그의 일갈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임성훈·hoon@kyeongin.com  /2004.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