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 - 인천 인물

[인천인물 100인] 10. 제물포고 초대교장 길영희 선생

아름다운비행 2005. 8. 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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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물포고에 세워진 길영희 교장 동상. 동상 앞에 누군가 놓고간 꽃다발이 보인다.


'양심의 50년 민족을 지켰고, 학식의 50년 사회를 이끈다'.

지난 7일 찾은 인천시 중구 전동 응봉산 자락의 제물포고등학교. 최근 가진 개교50주년 행사에 맞춰 단 대형 플래카드는 '양심'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었다. 보통의 학교는 '학식'을 먼저 내세우게 마련이지만 이 학교는 양심이 먼저였다. 제물포고등학교는 요즘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도 드물다. 올 해 치러진 대입 수학능력시험 부정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요즘 전국의 방송, 신문은 경쟁적으로 이 '양심 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양심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 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길영희(1900∼1984년)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 교장은 1956년 봄 교직원 회의에서 '무감독 시험'을 제안했다. 당시로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파격적인 얘기였다. 반대도 많았지만 선생은 그 뜻을 관철시켰고, 무감독 시험은 지금껏 제물포고의 자랑스런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사진 출처: '개울가재'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popopo0099/220411334090  

 

길 선생은 이 제도 시행 이후 전교생 총 569명 중 60점 이하를 받아 낙제한 53명의 학생에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제군들이야말로 믿음직한 한국의 학도”라고 칭찬한 뒤 “다음에 좀 더 열심히 노력해 진급하도록 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이 낙제생들은 다음 학기에 모두 진급했단다.
 
이런 무감독 시험에 대한 지금 재학생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학년 이충일군은 “무감독 고사의 훌륭한 정신이 오늘의 (제물포고)전통을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자랑스러워 했다. 같은 학년 김상민 군도 “길영희 초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 무감독 시험은 학생과 선생님 간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이 것은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우리 학교만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길 선생의 가르침은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학생들의 가슴 속에 이렇게나 선명히 남아 있었다.
 
지금도 학생들은 시험시작 전에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는 선언을 하고 무감독 시험을 치른다.
 
학교 교정에서 본 또하나의 눈에 띄는 것은 길 선생의 동상. 선생의 동상 앞엔 시들지 않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학교 관계자들도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인중·제고 총동창회' 관계자는 “요즘들어 부쩍 길 교장 선생님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면서 “아무도 모르게 꽃다발을 동상에 놓고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 길영희 선생 재직 당시의 제물포고 교사.  사진출처: : '개울가재'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popopo0099/220411334090   

 
평안북도 희천군에서 태어난 길 선생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함석헌 선생과 교류를 시작했다. 함석헌 선생은 후일 '길영희선생 추모문집'에 실은 '이상(理想)의 인간 길영희선생'이란 제목의 글에서 길 선생에 대해 “인천에서 맹렬한 교육활동을 한 교장자격 있는 분'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생대표로 3·1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5년부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고, 1938년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 건설에 착수해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나선다. 여기서 선생은 청년들을 상대로 강습회를 여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본격화한다.
 
일하면서 가르치는 참교육자의 길을 걷는 길 선생의 모습을 보아 온 인천중학교 한국인 졸업생과 재학생 대표, 학부형대표들은 해방 직후 회의를 갖고 길 선생을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의, 승낙을 얻어낸다. 하지만 이 때까지 학교엔 미군이 주둔해 있어 중구 신흥동 길 선생 자택에서 학생 60명, 교사 6명으로 4년제 4학급 학교로 문을 연다. 대한민국 교육계에 '길 교장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61년 5·16 이후 교원 정년이 65세에서 5년이 단축되면서 그 해 10월4일 정년퇴임하게 된다. 교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지는 않았다. 자택에서 학원(대성학원)을 열어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청년들을 가르쳤다. 1967년 68세의 나이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근처에 '가루실 농민학교'를 설립했다. 여기선 금연과 도박 폐지운동도 펼친다. 평생을 교육에 정진한 것이다.
 
선생과 관련한 일화도 많다. 땀을 흘려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유한흥국(流汗興國)을 교육지표로 삼아 교사 신축 때 학생들도 곡괭이와 삽을 들고 공사에 참여하도록 했고, 1960년엔 학교 운동장을 야당인 민주당대통령후보 유세장으로 내줬다가 집권당이던 자유당으로부터 압력을 받기도 했다.
 
선생의 이런 기백을 본받은 당시 학생들도 '반골기질'이 다분했다고 한다. 5·16 직후 교원 정년을 줄여 선생이 정년 퇴임할 수밖에 없게 되자 학생들이 나서 서울에 '데모'를 계획했던 것이다. 이 때 상황을 지금의 추연화 교장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제고 2학년생이던 추 교장은 “가을 소풍으로 위장해 서울 덕수궁에서 모여 교원정년 단축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로 했었다”면서 “이런 내용이 미리 정보기관에 알려져 결국 실행에는 실패했다”고 회상했다.
 
추 교장은 특히 “(길 교장)선생님의 큰 뜻에 저는 손톱만큼도 따라가지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다”면서 “그래도 선생님이 만든 무감독 시험과 같은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학생과 교사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길영희 선생 기념사업회는 전국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길영희 교육상'과 전국 중·고·대학·일반부 대상의 '길영희 선생 추모문집 독후감현상문 공모' 행사를 펼치고 있다.

 
[인터뷰] 길영희 선생 제자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선생님을 처음 뵌 게 인천중학교 입학시험을 하루 앞둔 예비 소집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복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운동장의 교단에 올라오셔서 오른 팔을 들고 몇 마디 격려의 말씀을 주셨어요. 소박한 한국식 옷차림과 그 우렁찬 목소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길영희 교장 밑에서 배운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은 길 선생의 이미지를 이렇게 회상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꼭 두 가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겨울엔 두루마기였고, 다른 계절엔 국민복이었습니다. 양복차림의 모습은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선생님은 외양에 관심이 없었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착이 깊었으며, 검소하고 질박한 생활을 하셨지요. 또 음성은 대단히 커서 운동장에서건 강당에서건 마이크가 필요 없었어요. 우국지사나 애국투사의 열정적인 연설장을 방불케 했어요.”
 
선생은 학생들에게 '청소를 잘 해라', '예절을 잘 지켜라', '약속을 잘 지켜라', '품행이 방정해야 한다'는 등의 수신교과서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늘 '너희들은 커서 이 나라의 국사(國士)가 돼야 한다. 항상 이 나라 이 겨레의 운명을 걱정하고 이 나라 이 겨레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 자신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국사가 돼야 한다. 이것이 내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사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었다는 '교과서 파동'을 떠올렸다. “선생님이 어느 학생이 교과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셨나봐요.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무기없이 전쟁터에 나온 병사와 같다”면서 중·고교 담임교사를 불러 모든 학생이 교과서를 가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당시는 먹고 살기도 힘이 들었는데, 거기에 교과서까지 구하느라 진땀을 흘렸습니다.”
 
김 사장은 길 교장에 대해 “인천은 물론 우리나라의 희망의 집을 지어 동량을 길러 내신 분”이라고 평했다. 길 교장이 작사한 인중·제고의 교가 1절은 '여기는 희망의 집 인천중학교(제물포고교)'로 시작된다.

 정진오·schild@kyeongin.com / 2004.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