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 100人·75] 살신성인 전우애 소령 강재구
[인천인물 100人·75]살신성인 전우애 소령 강재구
겨레 위해 산화된 '젊은 영웅'
임성훈 기자 / 발행일 2007-05-02 제0면
>75<'살신성인 전우애' 소령 강재구
인천창영초등학교 본관 앞 강재구소령 흉상 아래에 적힌 글은 진정한 군인 강재구 소령의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천년 봄 가을 지나도 귀한 피 향내로 오히려 소매를 적시게 하는 그 사람 여기 서 있다. 몸은 부서져도 의로움을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사랑에 얽매이어 장하고 매운 정신 보아라 높은 슬기와 총명 뿜어낸 힘으로 온겨레 가슴을 밝혔으니 때는 바뀌어도 그 모습 새시대의 맥박 뛰는 이 하늘아래 살고 싶은 내력 되리라."
"중대장, 대대참모들이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보리밥 한사발과 콩나물국 그리고 단무지 뿐인 소찬이었지만 장교들은 반찬 타박은 커녕, 굶은 사람이 밥먹듯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제10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갑자기 식사를 멈추고 바로 옆에 앉아있는 용영일 대위에게 말을 걸었다.
'용대위, 오늘 수류탄 훈련인데 조심해야 될거야'.
난데없는 수류탄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강 대위쪽을 바라보았다. 강재구 대위는 진지한 얼굴표정으로 차분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초대 재구대대장 박경석 장군이 쓴 '그날'(동방문화원)의 한 대목이다. 이 책에 따르면 강재구 소령(당시 대위)은 '그날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수류탄과 '악연'이 있었다.
강재구 대위가 제1군단 하사관학교 수류탄 교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모의수류탄 훈련을 마치고 실제 수류탄을 투척하기 위해 적당한 훈련장을 물색하던 강 대위는 농작물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논밭을 피해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몇개 조로 편성해 수류탄 투척을 하는데 유독 수류탄을 무서워하는 사병이 있었다.
강 대위는 그 사병을 특별히 불러내 모의 수류탄으로 연습을 더 시킨다음 투척선에 데리고 가 직접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주며 던지게 했다. 그 사병은 수류탄을 받자 얼굴색이 파랗게 질리더니 눈을 딱감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 순간 수류탄은 앞으로 날아가지 않고 바로 머리위로 떠올랐다.
강 대위는 즉각 머리위로 떨어지는 수류탄을 받아 앞으로 내던졌다. 꽝 하고 굉음을 내며 수류탄이 폭발했다. 그 장소에 있는 당사자는 물론 강 대위와 훈련병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국가로서는 영웅의 탄생이지만 개인과 가족들에겐 '비극'이었던 사건의 서곡을 '그날'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날의 재구성
한때 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그날의 사건. 그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4년부터 자유 베트남을 돕기 위해 국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강재구 소령이 파병부대인 맹호부대 제1연대 제8대대 제10중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65년 8월. 파병을 자원한 강 소령은 부임 이후 부대원들과 연일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그해 10월4일 중대원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 북방면 성동리에 위치한 훈련장에서 수류탄 투척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은 고지의 능선에서 밑에 있는 총안구를 목표로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차례차례 수류탄을 던지던 중 순서에 따라 박모 이병이 능선에 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은 다음 팔을 뒤로 젖혔다가 힘있게 앞으로 던져야 한다. 그런데 박 이병이 팔을 뒤로 젖힐 때 수류탄을 놓치고 만 것이다.
뒤에서 이를 목격한 강재구 소령은 순간 몸을 날려 수류탄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지형이 평탄하지 않아 실패했고 수류탄은 대기중이던 중대병력 한가운데로 그대로 떨어졌다. 병력은 5명이 1개조로 편성돼 있었으나 수류탄의 유효반경 내에 대부분의 투척대기조가 위치해 있던 터라 수십명의 살상이 불가피했던 상황이었다.
순간 강재구 소령은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쳤고 곧이어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강재구 소령과 인천
살신성인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강재구 소령은 1937년 7월20일 인천시(당시 경기도) 금곡동 54에서 강진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 창영초등학교의 40회 졸업생으로 창영초등학교에 이어 인천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 육군사관학교(16기)에 입학했다.
이어 1960년 육관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수도사단 제1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군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후 작전장교, 경비중대장 등 여러 보직을 거친후 1965년8월27일 그의 피와 살을 묻게될 파월 맹호부대의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강재구 소령의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교 재학시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가 장사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야 했던 터라 그의 가정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2명의 남동생과 여동생 한명을 챙겨야 했던 그는 동생들에게 무척 엄격했던 형 또는 오빠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재구 소령의 막내 동생 강해구(55·서울 거주)씨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형이 아니라 마치 아버지 같았다"며 "학창시절부터 동생들에게 엄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때부터 이미 군인의 모습이 엿보였다"고 말했다.
강재구 소령은 육사생도 시절에도 동료를 아끼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산화한 후 한 육사 동기가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는 그의 인간 됨됨이가 묻어난다.
"그는 육사생도들 중에서 모범생과 우등생이었으나 결코 성적에 얽매이는 옹졸한 장교후보생은 아니었다. 기초군사훈련을 할 때였다. 뜀박질 훈련을 했는데 30여명의 후보생들이 완전무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 때 강재구 생도는 동료들의 소총 3정을 혼자서 짊어 지었다."
강 소령은 가족들도 끔찍히 아꼈는데 월남 파병을 지원한 것도 가족들을 위한 마음이 상당부분 차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강 소령의 어머니는 강 소령이 산화하기 한달 전에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당시 그는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에게 "내가 월남에 가서 돈을 보낼테니 너무 염려말고 잘 살아라"고 말하며 울먹였다고 한다. 한달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명이나 잃은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이 되고 말았다.
<임성훈기자·hoon@kyeongin.com>
출처 : www.kyeongin.com/main/view.php?key=328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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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인물 100人·75] 인터뷰 / 강소령 아들 병훈씨
"아버지 사랑 못받았지만 군인정신 잊지않고 있어"
임성훈 기자 / 발행일 2007-05-02 제0면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가 말씀하실 때는 늘 '남자다운 분이었다'는 말을 했어요."
강재구 소령의 외아들 병훈(42)씨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도 그럴 것이 병훈씨는 태어난 지 14개월 됐을 때 아버지의 비보를 접해야 했다.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극장에서 아버지를 소재로 만든 '소령 강재구'란 영화를 봤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상영관을 나설 때 친구들이 저를 보고 '병훈아'하고 불렀는데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더군요. 극 중에서 제 이름이 나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중학교 시절,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렸을 때에는 선생님이 그에게 일어나서 직접 읽어보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영웅'의 아들로 산다는 것이 그리 자연스럽지만은 않았을 터.
그는 "아버지가 늘 자랑스러웠지만,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제약을 받는 것은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병훈씨는 합격이 보장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으며 지금은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강 소령이 산화하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은 "병훈군이 적령이 되었을 때 우선적으로 육사에 입학하게 하라"고 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는데 이는 육사 창설 이래 처음있는 조치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군인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임성훈기자·ho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