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순신, 성공 못할 계획은 과감히 버렸다

아름다운비행 2020. 9. 3. 05:27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 전국 이순신 유적 360곳 답사해 새 책 '난중일기 유적편'에 실어

"정치적으로 이순신 이용 말라"

2019.11.1 / 유석재 기자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을 아십니까?" 노승석(50) 여해고전연구소장이 불쑥 물었다. "서울에서 시작해서 과천과 오산, 아산과 공주·구례를 거쳐 경남 합천에 이르는 약 260㎞의 루트입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죄인의 몸으로 서울 의금부를 나서서, 고향 아산에서 모친상을 치르고 합천의 권율 장군 막하에 들어가기까지 가장 고통스러웠던 69일간의 노정이죠." 그는 "그 길의 중요 지점이 어디인지를 모두 찾아냈다"고 했다.

국내 대표적 이순신 연구가 중 한 사람인 노 소장은 최근 새 저서 '난중일기 유적편'(여해)을 냈다. 한학자 출신인 그는 2008년 기존 '난중일기'에서 누락됐던 32일치의 일기를 새로 찾아냈고, 이를 바탕으로 '교감 완역 난중일기'를 발간했다. 이번 '난중일기 유적편'에선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전국의 이순신 장군 관련 유적지 360곳을 일일이 현장 답사해 고증한 뒤 그 사진을 수록했다.

5년 동안 5만㎞가 넘는 길을 왕복했다. "기름 값과 숙박비가 한 2000만원쯤 나왔을 겁니다." '난중일기' 번역본의 지명 해설이 현장과 차이가 있다는 일부 지적에 '모두 다 답사해서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이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 선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정치인이나 기업인은 이순신 장군의 말을

인용하기 전에 먼저 희생정신과 배려·겸양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산과 바다, 육지, 해안, 섬, 성곽, 관아, 누대, 사당, 봉수대…. 대부분 '난중일기'와 고지도에만 나올 뿐 때론 지번(地番)도, 가는 길도 없는 곳을 현지의 원로 학자와 주민에게 자문해 찾아다녔다. "여수 율촌면의 채석장은 전라좌수영을 지을 때 돌을 채취한 곳인데, 비 오는 날 현장을 확인하고 돌아오다가 1.5m 구덩이에 빠져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원균의 패전 이후 시찰을 위해 찾았던 합천의 동산산성은 암벽을 타고 올라간 끝에 해발 1000m쯤 정상에서 깃발을 꽂기 위해 구멍을 뚫은 바위를 찾아냈다. 기쁨도 잠시, 금세 해가 저물어 산을 내려오다 나뭇가지에 옷이 모두 찢기다시피 했다. 그래도 합천에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중 숫돌을 채취하고 무 농사를 지은 현장을 찾아내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얻었다.

이토록 많은 '이순신의 흔적'들을 찾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노 소장은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갖은 고초와 역경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국난을 극복한 현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곧잘 '이순신'을 언급하는 세태에 대해 그는 "이순신 장군의 희생정신과 배려·겸양의 자세 없이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마구잡이로 인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순신'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했다. "이순신은 모두가 '누군가 하겠지'라며 수수방관할 때 '이건 내 일'이라며 팔 걷고 나선 인물입니다.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리더십을 발휘했죠. 그냥 열심히 한 게 아니라 오직 '승리'라는 결과가 나오도록 철저한 플랜을 마련해서 성취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성공하지 못할 모든 계획은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버렸습니다."

배가 12척만 남았을 때 '이걸 가지고 싸워보라'고 부하에게 지시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도록 최적의 작전을 직접 짠 사람이 이순신이었다는 것이다.

 

‘난중일기’ 전문가 노승석 교수

“영웅 아닌 ‘인간 이순신’도 매력적”

박사학위 과정에 있었던 서른여섯 살 때(2005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완역본’(동아일보사)을 펴냈다. 지난해에는 난중일기(亂中日記) 중 알려지지 않았던 32일분이 담긴 충무공유사 일기초(忠武公遺事 日記抄·현충사 소장)를 발견했다.

난중일기 전문가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노승석(40·사진) 대우교수다. 그가 최근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과 여러 이본(異本), 이순신 장군 관련 문헌들을 비교 대조해 ‘21세기 정본(定本) 난중일기’를 완성했다.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난중일기의 교감(校勘)학적 검토’가 그것이다.

이번에 노 교수가 이본 중 초고본을 오독한 부분을 바로잡고, 초고본 중 알 수 없었던 것을 새로 찾아낸 부분이 80여 곳에 이른다.

 

지도교수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친필 초고본 이후 지금까지의 난중일기 중 가장 완벽하다”며 “읽기 어려운 초서를 젊은 학자가 다 판독해 냈다”고 말했다.

 

난중일기의 친필 초고본은 흘려 쓴 초서로 돼 있을 뿐 아니라 400여 년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돼 판독이 까다롭다.

난중일기의 이본은 필사본 난중일기 325일분(충무공유사 일기초·1693년 이후), 최초 활자본인 정조시대의 전서본(全書本) 난중일기(1795년), 1935년 조선총독부 산하의 어용학술단체인 조선사편수회가 1935년 간행한 난중일기초(草) 등 10건에 이른다. 노 교수는 여기에 20세기에 나온 난중일기 번역본 30여 건과 이순신 장군 관련 문헌들을 다 뒤졌다.

 

“일기를 한 줄 읽을 때마다 지금까지 나온 이본을 다 확인해야 하는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이제 초고본에서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난중일기 정본에는 각주가 2170개다. ‘21세기 정본’이 초고본과 여러 이본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일일이 밝혔다. 연구에 5년이 걸렸다.

 

전서본 난중일기의 선행본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순신 장군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인 이홍의가 이순신 관련 기록을 모아 1716년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을 펴냈으며 전서본 난중일기는 충무공가승의 내용에 난중일기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초서 해독에 뛰어난 한문학 전공자였던 노 교수는 2004년 문화재청의 국가가록유산 정보화 사업에 참여하면서 난중일기 초고본을 판독할 기회를 얻었다.

 

“전란 중이라 휘갈겨 쓴 대목이 많았지만 장군의 인간적 면모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난중일기의 이본들을 접하면서 오류가 거슬렸다. 지금까지 이순신 관련 문헌 정리와 연구는 지난해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펴낸 6권짜리 ‘충무공이순신사료집성’(위원장 손풍삼)을 제외하고 거의 없었다.

“해전의 영웅적 측면이 부각돼 장군의 인간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난중일기에 대한 분석은 엄밀하지 못했습니다. 그 가려졌던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고 싶습니다.”

 

[출처] 이순신 성공 못할 계획은 과감히 버렸다|작성자 wippingwi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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