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에서
파주, 연천 출장을 다녀오면서
자유로 연결도로를 타지 않고 구길로 해서 오면서
화석정을 가보았다.
옛날 파주 근무할 때 지나다니면서 두어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오랫만에 가보니
그 또한 새롭다.
이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라고 한다.
화석정 안에 걸린 시구,
율곡 이이 선생이 8세 때 지었다는 <八歲賦詩>.
八歲賦詩
林亭秋已晩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騷客意無窮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먼데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聲斷暮雲中 저녁구름 속으로 소리가 사라지누나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였다.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으며, 이이 때에 이르러 다시 중수된 유서깊은 곳이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잡는 등불이 호화찬란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임진강을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고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그 시절을 증명해주고 있어 쓸쓸하다.
율곡 선생은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은 폭포속에서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강을 건넜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율곡은 전쟁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장차 왕이 임진강을 건너 피란갈 것을 미리 예상하여 평소에 기름을 먹여 두었다고 한다.
말 없이 서 있는 화석정에서
잠시나마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 옛날, 선조는 이 곳 포구를 떠나
율곡이 만든 정자가 불타며 비추어주는 어둠을 뚫고
장대빗속에 임진강을 건넜다.
궁성과 백성을 뒤로 하고 강을 건너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령 560여년의 느티나무
그 위에 다람쥐 한 마리가..
수령 200년이 넘었다는 향나무
율곡은 멀리 적성, 연천 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쪽으로는 한강에 맞닿아 흘러내리는 강물.
옛날엔 많은 배가 왕래를 했었다지.
봄에 황복이 산란을 할 때면
숫놈들이 뿌려대는 정액으로 물이 희뿌였키까지 했었다는데..
지금은 별로 잡히질 않는다.
율곡의 8세 때 시를 새겨놓은 비문.
유구한 임진강과 화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