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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3탄!] 중국 교육위 연구지침서 ‘동북고대민족고고여강역’

by 아름다운비행 2007. 3. 22.
[스페셜 리포트/韓中 역사전쟁 제3탄!] 중국 교육위 연구지침서 ‘동북고대민족고고여강역’
“고조선·발해도 중국 역사다”
고구려는 현도군 句驪縣에서 태동한 지방정권
만주지역 신석기시대부터 중원문화 영향 받아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 구려현에서 고구려가 세워졌기 때문에 고구려는 당연히 중국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고구려 멸망후 세워진 발해도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계를 맺었다.’

본지가 최근 긴급입수한 중국의 만주사 연구지침서 ‘동북고대민족 -고고여강역’(東北古代民族-考古與疆域)이라는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중국의 최고 교육행정기관인 중국교육위원회가 1997년 발행한 것으로 돼 있는 이 책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발해는 물론 고조선까지 중국사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7년 전인 1997년부터 정부 기관의 주도 아래 한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해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학술 프로젝트를 추진해 오고 있음이 드러났다. 지금까지는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추진 기관이 중국 사회과학원이고 그 착수 시기도 1998년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1년 앞서고, 사회과학원 외에 중국의 교육정책을 총괄하는 교육위원회가 프로젝트 추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주목되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이 현재 동북공정을 총지휘하는 중국 사회과학원의 입장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의 몇몇 학자들은 이 책이 ‘동북공정의 지침서’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 책이 중국의 정부 기관인 교육위원회에서 발간했다는 점과, 교육위원회가 지정한 과제를 여러 학자들이 각 분야를 맡아 정리했기 때문이다. 만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이라는 틀에 넣는 것을 목표로 밝힌 이 책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장박천(張博泉) 전 동북사대 교수와 위존성(魏存成) 길림대 교수다.

장교수는 문헌과 이론 분야의 책임자이며, 위교수는 고고학 분야의 책임자로 되어 있다. 장교수는 한국 학계에는 잘 알려진 사학자는 아니지만 중국 학계에서는 만주 지역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장교수가 주로 담당한 것은 총론 부분이다. 그렇지만 장교수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책에 자신의 만주사 연구를 게재해 주목된다.

장교수는 다른 중국 학자들과 달리 ‘중화’(中華)의 기원을 원(元)의 중국 통일로 보기 때문이다. 중화의 기원이 원나라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원이 일어난 지역인 만주를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교수의 이 같은 주장은 만주 일대를 지배하던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동북공정의 기본 방침과 일치한다.

고고학 분야의 대표격인 위존성 교수의 전공은 고구려사며 “만주 지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사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한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터전인 만주를 예부터 중국 역사의 일부로 보는 두 교수가 동북 민족사를 연구했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단순하게 학자의 견해를 벗어나 중국 정부가 만주 지역의 지배를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전제 하에 만주 지역사를 보고 있다. 먼저 중국은 역사를 보는 기준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중국 통사를 보는 시각이다. 이 책에서 중국 역사의 전환점의 기준이 되는 것은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중국 통일이다. 그리고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중국을 두 단계로 나누어 본다.

“원나라의 통일이 중화의 기원”

img3R첫번째 단계는 하(夏)나라에서 시작해 수(隋)·당(唐)까지다. 이 시기는 중국의 전통적인 지역 분류법인 구주(九州) 안에서 ‘내형’(內型), 즉 중원(中原) 왕조의 직접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과 융(戎) 또는 사해(四海)로 부르는 지역(중원의 직접적 통치를 받지 않지만 그 영향을 크게 받는 ‘외형’(外型)세력으로 나눈다.

둘째 단계는 요(遼)·금(金)·송(宋)·하(夏)의 경우 ‘다왕국’(多王國) ‘열국’(列國) 또는 ‘열부’(列部)로 표현할 수 있는 시기다. 이 시기는 불완전한 통일 시기인데 이를 ‘전중화’(前中華)로 보는 것이다. 그 후 원에 의해 통일을 이루게 되고 이어 ‘중화일체’(中華一體)의 시기가 도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책은 민족관에서도 한국 학계와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민족의 형성이 어떤 순수한 공동의 자연발생적이거나 이해타산 또는 공동생활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때때로 변하는 정치적 결정에 의해 형성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중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역사를 보는 관점으로 정하고 있지만, 때에 따라 ‘속인주의’(屬人主義)를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관을 보는 시각은 전통적 사고방식과 일치한다. 이른바 내형과 외형으로 문화 수준을 나누어 보는 시각이다. 내형이란 내지(內地)인 중원 지방이 우수한 문화이며, 외지(外地)인 변방은 수준이 떨어지는 문화를 뜻한다. 따라서 변방은 중원의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중국의 역사를 보는 기준과 민족관, 문화관을 통해 만주를 중화라는 공동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기준으로 장교수와 위교수는 만주 지역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중국 역사에서 첫번째 왕조는 하(夏)나라와 상(商)나라다. 이 때 만주 지역은 고죽국(孤竹國)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상나라의 제후국이다. 그 후 서주(西周)가 건국되면서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는데, 이 조선의 위치는 원래 상의 제후국이 있던 곳이다.

그 후 중원의 중앙 왕조가 약화되자 지방의 제후들이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자 ‘조선후’(朝鮮侯)도 ‘조선왕’(朝鮮王)이라고 칭하면서 연(燕)나라에 대항했다. 그 후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조선의 서쪽 지방을 차지하면서 지금의 청천강을 경계로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나뉘어졌다.

서한(西漢)시대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망명해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세웠다. 위만이 서한 정부에 반기를 들면서 만주를 휘하에 두자 서한 정부는 위만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는데 그 범위가 현재의 한반도 중부 이북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그후 한사군 중 하나였던 현도군 안에 구려현(句驪縣)이 있었는데 여기서 바로 고구려가 성립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환인(桓仁) 지역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중국의 내형 지방에서 일어난 외형으로 당연히 중국의 일부가 된다는 주장이다. 그후 고구려가 지방정권으로서 중앙 정권에 반기를 들다 당나라에 멸망당했고, 이어 발해(渤海)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한국 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한다. 한국 학자들이 발해를 연구하는 것을 보면 신라를 남조(南朝)로 보고, 발해를 북조(北朝)로 부르면서 서로 같은 민족의 역사라고 인식하는 듯하다.

그러나 신라는 발해를 북조라고 불렀지만 발해는 신라를 남조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더구나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 정권인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신라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신라와 동일한 민족 또는 국가에서 갈려 나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img4L오히려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공을 바치면서 지방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발해 멸망 이래 요나라와 금나라가 세워졌으나 그들 역시 별도의 독립된 정권이 아니라 송나라에 귀속된 지방정권이었다.

물론 나라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전쟁을 하기도 했고 황제가 포로가 되는 일도 있었지만, 이 역시 별개의 국가간 전쟁이 아니라 외형 정권인 변방 정권에 포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전체 만주 지역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내형과 외형이라는 논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내형이란 중원 정권의 직할을 받는 것이다. 반면 중원 정권의 지배를 받지 않고 변방에 독자적 왕국을 건설하면 외형이 된다. 한사군은 내형이 되지만 고구려는 외형이 되는 셈이다. 그 근거는 내형 정권과 외형 정권의 조공(朝貢)과 책봉(冊封)관계다.

이 책은 고고학적 관점에서도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본다. 역사는 옛 문헌의 해석과 유물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 책은 고구려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주의 유물도 중원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필자들은 만주 지역사의 시작을 구석기시대로 본다. 그러나 그 만주 거주인들이 오늘의 현생인류와 이어지느냐 하는 의문에 대한 논란은 제외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이 만주사의 시작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만주 지역의 역사가 깊고 중원 지역의 구석기문화와 연결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만주 지역이 신석기시대부터 중원 지역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중국의 상고 시기의 신화와 연결시키려는 내용도 있다. 중국에서 신석기 후기 문화를 가리키는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우수성도 상당부분 강조한다.

“고구려 적석묘, 홍산문화 영향 받아”

홍산문화는 북으로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과 노합하(老哈河)에서 남으로 대능하(大凌河) 유역과 하북(河北)지방 연산산맥(燕山山脈) 이북까지 광범하게 분포하는 신석기시대 말기까지의 장구한 기간 지속된 신석기문화다.

기원전 4,000년 께까지 시기를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1935년 내몽골 적봉(赤峰) 홍산후(紅山後) 유적 발굴을 계기로 최근 50여 년간 발굴 자료가 증가했고 중국 선사시대 문화의 한 줄기로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중국은 홍산문화의 적석묘와 고구려 초기 적석묘의 유사성을 주요한 논거로 제시한다.

청동기시대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중원 지역의 왕조인 하나라와 상나라의 문화를 연결시키려는 글을 볼 수 있다. 특히 요서(遼西) 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중원 지역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철기시대나 고구려·발해 시기는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아 매우 발전한 문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만주 지역과 중원 지방의 유물을 비교하면서 자주 엉뚱한 표현을 사용한다. 중원 지역의 문화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만주 지역의 문화 요소 가운데 우수한 요소들은 반드시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아서’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이다. 이처럼 중국 학자들은 만주의 모든 것을 중화에 몰아넣기 위해 뚜렷한 근거 없이 역사를 편협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img5L중국 학자들이 만주사를 중국사 또는 중화에 포함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시작됐다. 1990년대 이전에는 국가에서 개입한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개별적 연구 또는 견해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만주사를 중국사로 만들려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북공정인 셈이다.

이렇게 중국 정부가 억지로 만주사를 중국사로 만들면서 곳곳에서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중국 학자들이 한국사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사의 가장 기본적인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수·당에 걸쳐 고구려가 전쟁해온 사실을 이 책에서는 지방정권인 고구려가 중앙 정부인 수·당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기자동래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했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 중국인들이 중화 사상에 입각해 조작해낸 것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 유역과 만주·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하지만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중국 황하 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중원문화를 전수했다면 은나라에서 사용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하지만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학자들이 무지함과 동시에 자기중심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동북고대민족’이 출판된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최근 중국에서는 만주사 관련 서적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만주를 중화에 포함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하면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보완해 가면서 전체 동북아시아의 역사 패러다임을 다시 짜고 있는 의도로 보인다.
한만선 월간중앙 기자 (hanms@joongang.co.kr [2004년 08월호] 2004.08.23 입력